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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 십 일 조 편 -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를 내는 두 가지 이유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 
율법(십일조)의 내용과 형식을 짚어보자 
율법의 목적 
십일조는 왜 존재하는가? 
오늘날의 십일조는 율법의 형식이 아닌 정신을 살려야 한다 
십일조, 뿌린 만큼 거둔다? 이게 성경적인 거야? 
한국교회 십일조의 특수성 
십일조 정신에 맞는 진정한(?) 십일조 사용하기 
한국 교회의 특수 상황 
다시 한번 핵심은 '십일조 정신'에 따라 행동하기 
황코치 > 
경건의 모양은 없으나, 열심도 없는 모태신앙 크리스찬. 
하지만, 한국교회에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 다수 중 하나. 
주된 활동분야는 커뮤니케이션 전문 코치. 
hwangcoach.co.kr 
신목사 > 
조용한 양평에서 무명, 불편, 환대를 추구하며 
아내와 아들 넷과 함께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을 소통하기 위해 
실험 중인 목사. 주된 관심은 건강한 신학의 대중화. 
십일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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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내는 두 가지 이유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 
어이 신목사,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십일조 이거 꼭 내야 
되냐? 
그보다 내가 먼저 물어볼게. 넌 왜 교회에 십일조를 내냐? 
흠…모 교회에서 내라고 하니깐? 
또 성경에 써있잖아. 십일조 내라고 
그렇게 따지면, 교회에서 지키라고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솔직하게 넌 십일조를 왜 내냐? 
인간적으로 까놓고(?) 말해보자. 솔직히 예전에는 목사들이 
십일조 내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일종의 투자 개념으로 
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지. 내가 한 달에 백 만원 버 
는데 십만원을 십일조 하니까 나중에 연봉도 많이 오르고, 
보너스도 받으면 좋겠다는… 크크 물론 난 점잖은 신앙인이 
니 대놓고 기도제목으로 내놓지는 않지만 그런 속내가 있는 
거지. 또 한편으로 십일조 안내면 벌 받을 것 같으니까 보험 
같은 느낌으로 낸 것도 있구. 이런 거 있잖아. 내가 십일조 
안내서 지난주에 교통사고 난 거 아냐? 아님 가족 중에 누가 
아픈 거 아냐? 모 이런 거지. 불확실한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지금은 그런 생각보다 십일조 
가 좋은 일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십일조 자체를 
드리는 건 오케이인데, 교회가 십일조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서 십일조 내고 싶지가 않아 
일단 니가 한 말에는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모두 
있는 것 같아. 
첫 번째 입장은) 교회에서 십일조 잘 내면 복주고 안내면 
벌받는다고 가르치니까 벌받기 싫고 이왕이면 복 받고 싶어 
서 내는 거야. 한국의 교인들한테 이런 생각이 아주 강한데 
이건 좀 변화가 필요하구. 
두 번째 입장은) 십일조 내는 것 자체는 좋은데 교회가 십일 
조를 엉뚱한데 쓰니까 자꾸 자기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게 아 
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데, 이건 기본적으로 교회의 잘못이 
거든.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두 가지 입장에 대해서 다 한번 얘기해 
보면 좋겠어. 
福 
좋아. 우선 사람들이 복을 받고 싶고 저주를 받기 싫어서 십 
일조를 내는데 너는 도대체 복 받는다는게 뭐라고 생각해? 
뭐 일단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복 받는다고 하면 물질적인 
축복이나 건강, 승진 이런 거를 생각하지 않을까? 
그럼 너는 복을 받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하하. 생각해보니 나 역시 속물이라 뭐 사건 사고 없고...돈도 
많이 벌면 더 좋구... 
속물이라기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복을 참 좋아하잖아.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복’에 물질적인 번영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복’ 개념과는 좀 달라. 
성경이 말하는 ‘복’은 기본적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 
만족스러운 상태거든. 
우리가 돈을 좋아하지만 사실 우리가 돈 자체 때문에 행복한 
건 아니잖아. 내가 사람들한테 종종 하는 질문이 천억 가지 
고 무인도에서 혼자 살래 아니면 돈 많이 없어도 사람들이랑 
어울리며 같이 살래? 하는 거야. 
그러면 열이면 열 모두 돈 없어도 사람들이랑 알콩달콩 같이 
살고 싶다고 해. 그렇게 돈타령을 하면서 정작 사람을 택해. 
왜냐면 돈 자체가 우릴 행복하게 해주는 거는 아니거든. 돈 
이 우리의 관계에 도움이 될 때 행복한 거지. 
성경을 보면 인간은 본래 ‘관계적인 존재’야.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 속에서 안정감도 찾고 기쁨 
도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거지. 
황코치는 1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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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십일조)의 내용과 
형식을 짚어보자 
자~ 그렇다면 우리가 받고 싶어하는 ‘복’은 뭐냐? 
관계를 깊고 풍성하게 해주는 게 바로 ‘복’이야. 
사실 성경이 말하는 ‘죄’ 라는 것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 
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거거든. 죄로 인해 하나님과 소통이 
안 되는 상태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거고.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소통이 다 
시 이루어지고,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소통되는, 이게 진정한 행복이거든. 
우리는 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잖아. 같 
이 무언가를 공유하고, 함께 무언가를 즐기고 나누고. 
정리하자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핵심도 회복된 관계에서 
오는 편안하고 행복한 기쁜 상태인 거지. 물질을 많이 소유 
하는 것 자체가 ‘복’은 아닌 거야. 그래서 성경에서 ‘복’을 준 
다는 의미도 그런 게 아닌 거지.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어떤 물질적인 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 
고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거다? 
그렇지. ㅎㅎ 하나님과 인간관계 뿐 아니라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되는 거지. 
그게 복이다? 
그럼, 이게 복이고 복음(gospel)인거야. 
오케이 클리어하구만. 관계를 중심으로 복을 이해하는 게 성 
경적인 개념이라는 거지. 
그렇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에 대한 잘못 
된 개념을 바꿔야 십일조 관련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접근하면 이제 문제를 다시 풀 수 있겠네. 그럼 다시 
십일조로 돌아가서 도대체 십일조는 왜 내야 되는 거야? 
십일조를 왜 내야 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이 왜 십일 
조를 포함한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그래 맞아. 구약의 율법은 지금도 지켜야 되는 거야? 어떤 건 
안 지켜도 된다고 하고 어떤 건 지키라고 하고 어떤 게 맞는 
거야? 예를 들면 뭐 ‘번제’ 이런 거는 이제 안 지켜도 되는 거 
잖아? 현실적으로도 당장 이런 거 할라면 119 출동하고, 
장난 아닐걸. ㅋㅋ 
지금 니가 말한 문제는 구약의 율법을 신약시대인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좀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우선, 신학적으로 봤을 때 구약에서 요구하 
는 모든 제사들과 모든 율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이 됐어. 이제 완전히 끝이 난 거지. 
일단 제사만 보면 모든 제사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희생 
제물이 되어서 자기 몸을 드리셨기 때문에 완전히 성취된 
거야. 원래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거였거 
든. 아까도 ‘관계’의 중요성을 얘기했는데 ‘제사’는 죄로 인해 
서 하나님과 소통(관계)이 끊어진 상태가 된 인간이 다시 하 
나님과 연결이 되고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었단 말이야. 근데 
이게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제사라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됐거든. 신약교회의 특권이 성령 안에서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는 예배를 드릴 수 있 
는거거든. 
율법에는 형식과 내용이 있는데 신약 시대에는 형식은 사라 
지고 그 내용만 살아남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율법의 형식 
들은 ‘무효’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율법의 내용과 정신은 신약에도 살아남는데 율법의 
정신을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시거든. 구약의 모든 율법의 정신을 압축한 것을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십계명의 정신을 예수님이 
다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셨단 말야.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라는 율법의 ‘정신’은 
오늘날도 유효한 거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게 굉장히 중요해! 
2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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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구약의 율법은 완성이 
됐다. 그래서 구약 율법의 형식적인 것들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하지만 구약의 정신,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지금도 지속된다. 정도로 정리하면 되겠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외우기 좋네. ㅎㅎ 
우리가 율법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게 하나님이 도대 
체 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나 하는 그 이유야. 하나님이 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실까? 잘 지키나? 안 지키나? 체크할라 
고? 
글쎄 그건 생각을 안 해봤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행복’ 
을 위해서야.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어. 
첫째로) 율법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에 
게만 의미가 있어. 사실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율법이라는게 의미도 없고 강제성도 없는 거야. 
율법이 무엇이냐고 할 때 율법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 
이거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한테나 내 말만 들어라 하지 
않으시거든. 
예를 들어서 나는 내 아내한테 "당신 내 말 들어야 돼" 라고 
말할 수 있는 거거든. 내 아내니까 내 여자니까. 내가 다른 
여자한테 가선 그런 얘기 안한단 말야. 특별한 관계니까 특 
별한 요구를 할 수 있는거지. 
하나님도 자신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들’한테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백성 이었다면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 새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들이 언약백성이거든.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들어야 하는 
거지.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거야. 이 내용이 정말 중요해.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는 건 그래 
야 우리가 행복해지기 때문이야. 
십일조를 포함해서 구약에 나오는 모든 율법은 결국 우리를 
위한 거야. 율법을 지켜서 이익을 보는 쪽은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인 거지. 
생각해봐.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살인하면 누가 손해야? 내가 누굴 죽였어. 이게 하나님한테 
어떤 타격이 갈까? 남을 죽이고 나면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 
운 거야. 나머지도 마찬가지야.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내가 파 
괴되고, 내가 간음하면 나와 우리 가정이 파괴되는 거야. 그 
런데 인간은 죄성 때문에 자꾸 죄를 짓고 싶어하니까 하나님 
이 우리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거란 말이지. 
결국 율법을 왜 주셨느냐?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행복해지라고 
주신 거야. 우리가 이런 차원에서 율법을 이해해야 돼. 
셋째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는 기쁨이자 
영광이 돼. 
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잖아. 우리도 부모라서 알지만 사랑 
하는 자녀들이 행복해 할 때 부모는 더 행복해 지거든. 존 
파이퍼 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셨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해 할 때 우리로부터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 안에서 행복해 
할 때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행복해하신 다는 거야. 
이게 우리 아버지라는 거지.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를 기뻐 
하시기 보다는 우리가 행복해 할 때 기뻐하신다는거지. 하나 
님이 우리한테 좋은 선물을 주셨어. 그런데 우리가 그걸 받고 
너무 기뻐하고 좋아한단 말야. 이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한테 
는 너무 큰 기쁨이 된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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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목적 
3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십일조는 왜 존재하는가? 
이제 우리도 아빠가 되었으니 이해되지 않냐? 
하하 그래 아빠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이해되는 군. 물론 
100%는 아냐. 난 아직도 내 딸 선물보다 나한테 주는 선물 
이 더 좋아. ㅎㅎ 
크크 다행이 하나님은 너와 좀 달라. ㅎㅎ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생각해보자구. 
하나님이 치사하게 십일조 안 냈다고 삐지시고 벌주시고 
이런 분이 절대로 아니거든.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치사하고 
째째한 분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 
한번 생각을 해봐. 까놓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릴려고 자기 
아들을 주신 분이야. 그런 분이 치사하게 우리 돈 몇 푼 받겠 
다고 복주고 안주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이해 자체가 굉장 
히 잘못된 거야. 
내가 백 만원 내야 되는데 몇 만원 덜 냈다고 벌주고 좀 더 
내면 괜히 더 챙겨주고. 절대로 이런 분이 아니라는 거지. 
다행이다. 나랑 다르셔서. ㅎㅎ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결국에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거다. 자녀인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행복해하는 것을 보시면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니까. 십일조 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거네. 
그렇지 그런 거지. 
좋아 이제 그럼 본격적으로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십일조는 뭐고 왜 내야 하는 거야? 
우선 십일조도 구약의 율법 중 하나야. 
구약 성경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이 나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서 얻게 된 소득 
의 십 분의 일을 성전으로 가져가서 제사 업무를 담당하는 
레위인과 제사장에게 가져다 바쳐야 됐어. 레위인과 제사장 
들은 농사를 지을 땅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준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지금은 레위인도 없고 제사장도 없잖아. 
가끔 이상한 목사들이 목사가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그건 미 
안하지만 정말로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소리거든. 이제 우리 
의 유일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어. 그리 
고 예수님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 
에 이제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서의 십일조는 다른 제사들 
처럼 이제는 끝났다고 볼 수 있어. 
그럼 이제 십일조는 안내도 되는 거야? 그럼 교회에선 도대 
체 왜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거야? 
지금 한국 교회에서 십일조를 내는 문제는 좀 복잡하니까 
우선 십일조의 내용, 십일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다음에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케이. 일단 접어두고. 그럼 ‘십일조’라는 율법의 목적이 
도대체 뭐야? 
우리가 어떤 것의 용도를 보면 그 목적을 알 수 있잖아. 가령, 
볼펜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볼펜의 목적을 알 수 있고, 
자동차의 용도를 알면,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십 
일조의 목적을 알려면 구약시대에 십일조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보면 돼. 
구약시대에 십일조의 용도는 크게 세 가지였어. 
첫째) 십일조는 예배를 위해서 사용됐어. 
레위인들이나 제사장이 했던 일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거든. 요즘으로 하면 레위인들은 예배 책임자들이었 
던거지. 그런데 이 사람들이 땅이 없었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12지파가 기업으로 땅을 분배 받는데 이 때 
레위인들한테는 땅이 기업으로 분배가 안돼. 당시에는 반드 
시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 수 있는데 레위인은 
땅이 없는 거야. 왜? 레위인의 기업은 하나님이라는 거지. 그 
러니까 하나님이 나머지 12지파 사람들한테 십일조를 내서 
레위인들을 먹여 살리게 하신 거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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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십일조로 제사를 담당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유 
지할 수 있게 하고 남은 것은 보관했다가 예배나 성전 유지 
에 필요한 것을 구입하는데 사용했던 거지. 
여기서 갑자기 생뚱 맞은 질문하나. 12지파가 아니라 14지 
파였다면 십일조가 아닐 수 있었을까? ㅎㅎ 
그건 아닐 것 같아. 십일조의 기원이 12지파에서 시작된 게 
아니거든.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전투에서 이기고 와서는 살렘왕 
멜기세덱한테 십일조를 드리거든.(창14장) 더욱이 십일조 
는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관습이 아니야. 고대 근동지역의 
나라들에서는 자기 신들에게 제물을 드릴 때 십일조를 드리 
는 풍속이 있었어.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드린 십일조 
는 아주 독특한 의미가 있었어. 똑같은 형식이지만 그 내용 
과 의미가 완전히 달랐던 거지. 이게 십일조의 두 번째 용도 
와 연결이 돼. 
둘째) 십일조는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 
었어. 
신명기를 보면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모아서 객, 고아,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먹이는데 쓰도록 하거든. 
이게 당시 다른 나라에서 드린 십일조와 매우 다른 부분이 
야. 다른 나라의 경우 보통 십일조는 신에게 드리는 거였거 
든. 
그런데 성경에선 십일조를 약자들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하 
는 거야. 멋지지 않냐? ㅎㅎ 
그리고, 레위인이나 제사장도 사회적 약자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어. 당시의 상황이 현재와 완전히 달랐단 말이지. 
요즘처럼 사회보장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는 경작할 
땅이 없으면 그냥 굶을 수 밖에 없는 거야. 땅이 없으면 당장 
생존이 불가능하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거지. 성경에서 특히 고아와 과부나 객이 사회적 약자로 
간주되는데 요즘처럼 일용직이라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 부모님 없는 아이들. 또 여자들. 당시는 
여자들이 일거리를 얻을 수가 없었거든. 그런 사람들은 구 
걸하거나 굶어야 되는 거야. 
셋째) 십일조는 공동체를 위해 사용됐어. 
신명기 14장에 나오는 십일조 규례를 보면 십일조의 정신에 
대해서 잘 나와있어. 
요즘에는 월급을 받아서 일년에 십일조를 보통 12번을 
하잖아. 그리고 보너스를 받거나 돈이 생기면 또 거기서 
10%를 하구. 그런데 예전에는 농사지었으니까 일년에 한 
번 수확을 한단 말야. 그러면 그 중에서 십 분의 일을 하나님 
이 정해두신 성막이나 성전으로 가지고 가라는 거야. 그런 
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가지고 간 십일조를 제사장과 가족 
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거야. 
여기서 잘 생각해봐야 할게 뭐냐면 당시는 요즘처럼 잘 사 
는 시대가 아니야. 굉장히 힘들게 농사를 짓고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함께 나눠 먹는 거야. 
일종의 잔치네. 잔치. 
그렇지. 잔치야. 더 재미있는 것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은 수확물을 가지고 가기 힘들잖아. 그러니까 
그걸 돈으로 바꿔서 돈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성전 근처에 가서 마음에 원하는 것을 사라는 거야. 
그런데 그 살 수 있는 품목이 재미있어. 소나 양이나 포도주 
나 독주나 마음에 원하는 것을 모두 사라는 거야. 
독주도? 
엉 그래. 그런데 당시에는 무슨 화학적인 술이 아니니까 
발효주인거지. 영어 번역에는 독한 술(strong drink) 또는 
발효주(fermented drink)라고 번역이 되어있어. 
암튼 술을 포함한 모든 원하는 것을 사가지고 하나님 앞으 
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게 바로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이었어. 일년 동안 열심히 일한 소출 중에서 제 
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과 가족들이랑 함께 나누 
어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거야. 
그러니까 일년에 한번 하는 파티네. 
페스티발이지. 절기는 우리 추석같은 명절인 거야. 
감사절과 같은 거네. 
그렇지. 너무 감사한 축제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십일조는 
나눠 먹는 거야 공동체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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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5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그런데 한번에 다 먹지는 못할 거 아냐. 그러면 저장해 놨다 
가 제사나 성전유지에 필요한 일에 사용하는 거지.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매 3년 째 십일조는 성전으로 가 
지고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성읍에 저축을 해서 마을에 있는 
약자들을 먹이는데 쓰라는 거야. 지역 사회의 약자들을 보 
호하는 복지의 기능을 위해서. 이것도 사실은 공동체를 살 
리기 위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겠다 
고 약속을 하시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복’도 무슨 떼돈을 벌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게 아니라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겠다는 거야. 
일한 만큼 손해보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거지. 
자본주의 사회가 돈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까 ‘복’하면 무슨 
떼돈을 부어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처음 시작할 때도 말했지만, 그런 
개념이 아니고, 굳이 물질적인 부분으로 접근을 한다 해도 
언제나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만큼 거기에 부어주시는 ‘복’으로 
이해해야지. 
자~ 여기서 구약의 십일조가 쓰인 용도를 정리해보면 첫째,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유지함으로 예배를 위해서 
사용되었고, 둘째, 사회적 약자들인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 
해서 사용되었고, 셋째,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됐다 이거지. 
그런데 어쨌거나 이미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율법의 형식은 
폐기가 된 거잖아. 구약의 십일조가 지금 우리가 십일조를 
내는 거와 어떤 상관이 있는 거야? 
오늘날의 십일조는 
율법의 형식이 아닌 
정신을 살려야 한다 
아까 말한 것처럼 율법의 형식은 이제 필요 없지만 율법의 
정신은 살려야 되거든. 
문제는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신약 시대에 어떻게 계승할 
수 있는가 하는 건데. 
교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초창기에는 십일조가 아예 없었거 
든. 그런데 중세 때 다시 십일조 제도가 부활을 해요. 이게 
십일조 정신을 어떻게 살려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다시 
구약의 형식을 가져온 거지. 
그러니까 처음에는 십일조가 없다가 다시 생겼다는 거야? 
응. 사실 신약 성경을 보면 십일조라는 말이 한번도 안 나와. 
그래? 신약에 십일조라는 말이 안 나온다고? 
복음서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있어. 
그런데 모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형식적으로 
드리는 것에 대해 비난하시기 위한 맥락에서 나와. 또 히브 
리서에서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내용 중에서 아브 
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내용이 언급되는 정도 
야. 이 내용들은 결국 구약의 십일조 관행에 대한 거라고 볼 
수 있어. 
실질적인 초대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는 사도행전이나 서신 
서에는 십일조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나오질 않아. 
그럼 초대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아예 안 했던 거야? 
응. 십일조는 안 했어.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십일 
조를 포함한 모든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단 말야. 그러니까 교회에서 무슨 헌금 
내라 이런 얘기를 안 했어.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모이면 
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밥도 먹고 그랬던 거지.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근으로 굶는다는 소식을 들었 
어.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우리 형제자매들이 힘드니까 우리 
돕자 그런 거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약자와 공동체를 돕는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계승한 ‘연보(捐補)’를 했어. 
‘연보’가 뜻이 뭐야? 
‘연보’는 한자어로 버린다, 준다는 뜻을 가진 ‘버릴 연(捐)’자 
와 옷을 깁는다고 할 때 ‘기울 보(補)’자를 쓰는데 ‘주어서 
보충한다’라는 뜻이야. 
쉽게 말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기부금과 같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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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6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한글 성경에는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에 ‘연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도 바울이 교인들한테 편지를 써서 한번에 연보 
를 하려면 부담될 수 있으니까 미리 모아두었다가 방문했을 
때 가져갈 수 있게 해라 그러거든. 
이런 의미에서 ‘연보’일종의 구제기금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공동체를 살리는 십일조 정신이 새롭게 적용된 거라 
고 볼 수 있지. 
사도 바울 입장에선 자기가 쓰는 게 아니니까 더 적극적이 
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거지. 
근데 위험하긴 하네. 성경의 어떤 특정 구절을 말해서 이익 
을 탐하는 교회를 철저한 기업 마인드로 ‘운영(?)’하시는 ‘목 
사CEO’들께서 이 구절을 이용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래서 교회에 목사 외에도 장로나 안수집사나 있는 거야. 
견제가 필요하거든. 교인들이 낸 물질을 제대로 사용하는가 
감시하는 거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교회나 국가 
나 똑같아. 
그래서 목사의 가장 큰 기능은 말씀사역을 하는 거구 돈과 
관련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 돼. 원래 집사가 왜 뽑혔냐 
면 교회의 돈 관리하고 구제하려고 뽑은 거거든. 사도행전 
에서 처음에 사도들이 구제까지 함께 하려니까 문제가 생겼 
거든. 그러니까 사도들이 우리는 이제 말씀과 기도에 집중 
하겠다. 그러니까 이제 믿을만한 분들을 여러분이 뽑아서 
그분들에게 돈이나 구제를 맡기자는 거야 
십일조나 이런 것도 원래 목사가 관여할게 아니네. 
당연하지. 원래 건강한 교회들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건물 짓느라고 망조가 난 거지. 
대출받고...ㅎㅎ 
그렇지. 또 다른 문제지만 성도들도 마음에 안 드는 거지. 
한국 교회가 욕먹는 이유도 이거지 뭐. 십일조 문제도 걷어 
들인 이 돈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잖아. 일단 교회 
안의 약자들을 돌본 다음에 그래도 남는다면 이제는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거나 
외부로 흘렀으면 한국 교회가 이렇게 욕을 안 먹고 지역사 
회에 도움이 되고 존경 받을 텐데. 
그렇지 그게 성경적인 거구. 
그렇지. 그런데 그게 안된 거구. 교회가 너무 탐욕스럽게 자 
기들의 왕국을 확장시켜 나간 거지. 대기업 확장시키듯이 
이게 망조가 된 거지. 우리가 잘 아는 교회들도 계속 건축을 
했잖아. 심지어 지었다가 부수고 또 짓고...결국 빚지고. 그 
런데 우리 어른들 세대에는 이게 통한거야. 일단 눈에 확 보 
이니까. 
목사가 "여러분이 드린 헌금으로 이 건물을 지었습니다." 
라고 하면 성도들은 “우와 대단하다.” 이러는 거지. 눈에 
보이니까. 
갑자기 욱하는 군. 그러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제 십일조 
는 안내도 되는 건가? 
쉽게 말하긴 어려운데 그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성경적으로 볼 때 이제 ‘십일조’라는 이름의 헌금은 안내도 
되지만 반면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십일조 정신’은 변하지 않았거든. 
쉽게 얘기해서 내 통장에서 지출되는 돈의 액수는 ‘십일조’ 
라는 이름으로 낼 때나 안낼 때나 똑같을 수도 있고, 도리어 
성경적 정신에 더 충실하게 물질을 사용한다면 십일조보다 
더 많은 돈이 나갈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십일조라는 명목 
으로는 교회에 안내도 괜찮은 거지. 
그런데 아직도 한국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 하는 
것으로 강조하잖아. 
사실 한국교회에서는 십일조는 주일성수와 함께 신앙의 핵 
심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문제가 있는 거지. 일단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율법은 완성되었다고 본다면 십일조 
도 이미 끝난 거야. 이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범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 
에 충실한 삶을 살면 되는 거지. 
자! 그렇다면 그럼 그 구체적인 방법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교회 역사를 보면 이걸 예전 사람들도 고민했단 말이지. 이 
방법을 고민하면서 다시 성경을 보니까 구약에서 가져올게 
있던 거야. 이미 구약의 율법이 형식적으로는 완성된 것을 
알지만 실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어 
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까 고민하는 중에 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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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7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율법 중에 하나인 ‘십일조’가 다시 등장한 거지. 
구약의 내용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신약의 
정신을 담는 구약적 형식으로 사용하게 된 거라고 볼 수 있 
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적용하는 형식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십일조’라는 형식은 그냥 그대로 다시 가져다가 쓴 
거라고 봐야지.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것 같아. 
십일조, 뿌린 만큼 거둔다? 
이게 성경적인 거야?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심하게 변질되지 않았나? 요즘도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를 일종의 ‘펀드’ 개념으로 생각하잖아. 
그치. 십일조 했는데 기대한 것만큼 수익(?)이 안 좋으면 서 
운하고. 이런 마음으로 십일조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십일 
조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하나님을 원망한다구. 내가 얼 
마나 열심히 드렸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하면서. 
펀딩을 열심히 했는데 망한 거지. 게다가 안 좋은 일까지 
생기면 따지려고 하겠지. 후후 
그러니까. 까놓고 얘기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거거든. 
처음부터 하나님이 다 주셨어. 생명도 주셨고 우릴 구원하 
시려고 아들까지 주셨어. 우리를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까 
지 다 주신 분이야. 우리가 이걸 받은 게 은혜거든. 
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거야. 기독교가 다른 종 
교와 다른 점이 뭐냐면 다른 종교는 인풋(input)만큼 아웃풋 
(output)이 나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거지. 내가 100을 
하면 100이 나오고 200을 하면 200이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게 주어지는 
거야. 이게 일반 종교의 메카니즘이거든. 
그런데 기독교는 이게 아니야. 우리가 인풋(input)하기 전에 
우리한테 이미 하나님이 먼저 다 쏟아 부어주시는 거야. 그 
런데 받고 나니까 너무 고맙거든. 너무 감사하거든. 받을 자 
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굳이 우리한테 주실 이유가 없거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셔야 할 책임이 없어. 
그런데 다 주셨단 말야. 아니 하다 못해 옆집 아줌마가 고구 
마만 가져다 주셔도 고마운 건데 하나님은 아들까지 주셨단 
말야. 이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반응이 나 
오냐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주님께 뭘 드릴 수 
있을까요? 뭘 할 수 있을까요?"가 되거든. 
이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거야. 그게 물질이든 헌신 
이든 봉사든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는 거지 이걸 
무슨 투자 개념으로 가는 게 아니라니까. 
맞아. 십일조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헌금, 
봉사, 모든 구제는 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의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겠네. 
그렇지. 그런데 한국교회는 교인들한테 은연중에 십일조 
하면 복을 받고 안 하면 벌을 받고 이런 생각을 심어줬단 말 
야. 이건 기독교가 아니라 사실 샤머니즘에 기초한 기복신 
앙이거든. 
이게 왜 이러는 걸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나도 거기에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아. 아닌 줄 알면서도 괜히 마음 한 구 
석이 불안하거든. 
내가 보기엔 교회에서 그런 강박을 심어줘서 그런 것 같아. 
예수님이 이미 끝내시고 자유하게 하신 율법을 다시 끌어다 
가 우리가 또 하나의 율법을 만들어 버린 거지. 
처음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란 게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되거든. 
파스칼의 <팡세>를 보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성 
이 아니라 습관이다.” 라는 말을 해. 우리는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거야. 
나도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자라오면서 십일조를 이렇게 
내야 된다고 배웠잖아.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면서 교회에서 
배운 개념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았어. 그런데도 마음 저 깊숙 
한 곳에서 왠지 찜찜한거야. 몇 십년의 습관이 우리를 불안 
하게 하는 거라. 오래된 습관, 이걸 사람들이 못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무서운 습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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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자 그렇다면 대안은 뭐냐?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서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되는 거지. 
습관은 나 혼자 들일 수 없는 거거든. 그럼 좋은 공동체가 어 
디 있냐? 여기서 막히는 거야. 그런데 사실 성경대로 행하 
는 공동체는 우리가 함께 만들 수 있어.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느냐는 거야. 그 동안 내가 기존 교회에 
다니면서 누리던 모든 편안함을 포기할 수 있느냐는 또 다 
른 문제거든. 
이거는 다음에 한번 대형교회에 몰림 현상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구. 
어쨌거나 한국 교인들한테는 십일조가 푸코가 말한 ‘훈육(- 
discipline)’일 수 있는 거지. 
인간이 학습으로 몸에 익어져 버린 것이 인간을 움직여 가 
는 거야. 그래서 훈육, 훈련이 중요하면서도 무서운 거지. 
잘못된 훈육을 통해서 습관이 들면 그것을 따르게 되는 거 
잖아. 
따르게 되지. 그러니까 인간이 공동체 속에서 주위의 영향 
을 많이 받는데 대부분 한국교회에 들어가면 주위가 다 그 
런 분위기야. 그러면 그 분위기에 흡수될 수 밖에 없거든. 
한국교회 십일조의 특수성 
그렇지. 
게다가 평신도같은 경우에는(평신도라는 용어자체도 문제 
가 있지만) 어쨌든 보통 신학이나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 
하지 않으면 성경에 대한 지식은 목사한테 밖에 얻을 수 없 
잖아. 그러니 목사가 잘못된 정보를 주면 그게 사실인줄 
알고 그 공동체는 그걸 다 추종하게 되는거지. 
그렇지, 맞아. <설득의 심리학> 같은 설득 관련된 책을 봐도 
'권위'는 아주 강력한 설득의 방법 중 하나이거든. 나는 외국 
교회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국 교회는 과도한 권위인건지 
는 모르겠지만 목사가 얘기한 것은 100% 아니 150% 따라 
야 하는 분위기잖아. 
그리고 심리학에서도 나오지만 어떤 집단에서 다 공통적으 
로 ‘예스(YES)’라고 하는데 누군가가 거기에 대고 ‘노(NO)’ 
라고 말하기도 힘들고. 
나만 하더라도 의심이 될 것 같기도 한데 다들 그렇게 그냥 
가게되면 그런가보다 하게되더라고. 믿음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십일조에 대한 걸 의 
심하거나 하면 믿음이 부족한 거라고 몰아가는 분위기가 
있잖아. 
솔직히 난 그게 십일조의 정신을 어기는 거 같아. 신앙이라 
는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사람들을 조작(manipula-tion) 
하는 거지. 한국교회가 처음 가르칠 때부터 굉장히 잘 
못된 부분이 많은 거야. 
처음이라는 게 시대적 처음을 얘기하는 거야? 아니면 신앙 
을 갖는 처음 시작을 얘기하는 거야? 
둘 다겠지. 일단 역사적으로 볼 때 소위 한국의 교회를 대표 
하는 주류 대형교회들의 가르침이 한국의 역사가 흘러오면 
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업적을 내고 
이런 흐름과 궤를 같이하거든…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야. 정치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것처럼 한국교회 안에도 매우 다양한 입장들이 있거든.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소위 유명한 대형교회들을 말하는 
거야. 
개신교도 한국 역사의 흐름과 같이 간다는 거지? 
그치. 원래는 교회가 세상의 잘못된 부분들에 대해서 비판 
하고 견제해줄 수 있는 매우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도 
리어 그런 세상의 잘못된 흐름을 환영하고 받아들인 거야. 
나는…그러니까 한국의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 
의 가르침에서 출발했는데…이게 미국의 개신교와 같이 
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물질적인 성장의 흐름이 미국도 그 
렇게 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국도 이걸 받아들인 거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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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9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십일조 정신에 맞는 
진정한(?) 십일조 사용하기 
큰 교회의 틀을 보면.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 진영과 한국 
의 주류 기독교와 흐름이 같이 가고… 
이거 잘못해서 미국 나쁜 놈하면 종북몰이, 좌파 이렇게 
몰리는 거 아냐? ㅋㅋ 
하하 어쨌거나 흐름을 같이 가고 있는 건데… 
사실 성경의 정신에 충실하면 할수록 보수가 보기에는 너무 
진보적으로 보이고, 또 진보가 보기에는 너무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어…. 가령 보수가 보기에는 성경은 지나칠 정도 
로 약자 배려나 부의 분배를 강조하거든… 
반면 진보가 보기에 성경은 지나치게 생명존중이나 동성애 
반대 등의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니까… 
그러니까 결국에 성경에 충실한 기독교인은 완전한 보수도 
완전한 진보도 될 수가 없어서 어느 쪽에서도 별로 환영을 
못받아…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맹목적으로 보수정당이 
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거지. 
왜 그럴까? 며칠 전에 광화문을 갔는데 한편에서는 기독교 
인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피켓시위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 다른 기독교인들이 반대시위를 하는 걸 봤 
다. 참 거시기(?)하더군. 
글쎄…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워낙 특이하니까… 
우리가 지금 십일조 논하는 것 자체도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야. 다른 나라에서는 십일조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되 
질 않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에는 십일조를 폐지했다가 
중세교회가 되면서 십일조를 다시 도입했단 말이야. 그 다 
음에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십일조가 다시 
폐지되거든. 우리나라의 상황과 외국의 상황 자체가 달라. 
유럽에서는 세금 걷는 것과 십일조와 무슨 관련이 있던 
건가? 
독일 같은 경우에 독일의 공식 종교가 루터교야. 그래서 
루터교 성직자들은 국가에서 월급이 나와. 공무원과 비슷한 
개념인 거야. 그래서 교인들이 십일조를 따로 낼 필요가 없 
이 국가에 내는 세금에서 목회자들한테 월급을 주는 거야. 
월급을 받는 거네. 
그치 월급을 받는 거지. 
이게 꼭 좋은 거냐는 또 다른 문제인데 어쨌거나 십일조가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심각한 이슈가 되는 것은 이게 돈문제 
라 그래. 돈이니까. 우리가 구약에서 십일조 외에도 안식일 
지키라는 개념을 가져와서 ‘주일성수’를 강조하는데 사실 
주일성수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만큼 심각하진 않거든. 중요 
하게 여기긴 해도. 
그렇지. 생각해보면 그것도 웃기는 거네. 역시 ‘돈’이 걸려야 
이슈가 발생하는 건가? 
그렇지. 십일조는 더 민감할 수 밖에 없지. 더욱이 요즘 
십일조가 더 문제가 되는 건 교회가 십일조를 제대로 못쓰 
니까 그래. 어떤 분들은 기꺼이 십일조 내고 싶어하거든. 주 
위에 보면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분들도 많아. 도리어 더 많이 못 드리는 것을 안타까워하기 
까지 해.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헌금이 교회에 들어갔는데 
교회에서 그 돈을 성경의 정신에 입각해서 이웃과 나누고 
정말로 좋게 잘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상한데 건축하고 말 
도 안되게 목사들이 자기 배나 부르려고 뒤로 삥땅치고 
이런 모습을 보니까 불안해서 못 내겠다는 거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좋지만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못 내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목사는 또 십일조는 자기 교회에 내야 된 
다라고 강조하는 거야. 그런데 목사 말이니까 아닌 거 같으 
면서도 지켜야 할 것도 같고, 이렇게 성도들이 갈등이 심해 
지는 거지. 
이거 얘기 잘했는데 내가 소속된 교회에만 내야 돼? 
원칙적으로 안 그래도 돼. 자율적으로 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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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10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원칙적으로 안 그렇다는 건? 
아까 말한 것처럼 율법으로서의 십일조 자체가 이미 무효 
니까. 
그러니까 사실 많은 질문들이 있는데 이런 질문들을 해결하 
려면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큰 그림이 있어야 돼. 일단 
율법이라는 것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되고 그 다 
음에 구약의 십일조의 내용, 십일조 정신이 무엇이고, 그 정 
신을 오늘날 계승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계승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들어가야 하는 거지. 
현실적인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십일조를 내는 게 레위인들 
을 위해서 내는 거잖아. 쉽게 생각해서 목사의 월급을 위한 
거잖아. 우리가 십일조를 안 하면 목사를 비롯해 사역자들 
이 굶잖아. 그리고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어디 동아리나 커뮤니티에서 회비 내듯이 
접근한다면 우리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게 맞는 게 아닌가? 
그렇지. 맞아 사실 통계를 보면 한국 교회의 80%이상의 
목회자들이 최저생계비 밑으로 살아가거든. 십일조를 내려 
고 할 때에 교회 공동체를 일종의 가족개념으로 보면 좋을 
것 같아.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있어. 그리고 그 공동체의 영적인 
리더인 목회자가 있단말야. 그래서 돈을 버는 공동체의 구 
성원들이 그 공동체의 목회자를 책임져 주는 것은 참 아름 
다운 모습이란 말야. 신약적으로 봐도 그런 개념이 있는 거구. 
이런 상황에서 만약에 내가 헌금을 안 하면 목사가 굶는다 
고 생각을 하면 이건 안 할 수가 없는 거잖아. 
이건 뭐 헌금하면서 하나님께 복 받는다 이런 개념보다 앞 
서서 사랑하는 가족이 굶는거란 말야. 
그러니까 일단 가족을 부양하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만약에 
좀 더 풍성해 진다면 이제 밖으로 흘려보내야 되는 거지. 교 
회에 자꾸 쌓아놓으려고 하지 말구… 
그런데 이게 안타까운 게 교회가 대형화가 되면서 익명성이 
커지고 내가 교회에 내는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되거든. 
그런데 공동체가 작으면 바로 바로 보이거든. 내가 낸 ‘연보’ 
로 교회 어떤 물건이 들어오고 힘든 교인들이 밥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다 보이는 거거든. 그런데 이 시 
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 가길 싫어해. 
귀찮거든. 너무 사생활이 노출되거든. 결국 공동체성이 사 
라지고. 그런데 결국 행복은 이런데서 오는 건데. 
그렇지 맞아. 
뭔가가 조금씩 아귀가 다 안 맞아 들어가는 거야. 정말 사람 
들이 원하는 건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행복해지는 건데. 
교회는 또 큰 교회를 가기 원해. 왜? 여러 가지 좋잖아. 주차 
도 좋구. 애들 교육도 좋구. 편하구. 
나도 그래. 그래서 큰 교회 다니잖아..ㅋㅋ 
그러니까 이런 모순들. 이런 것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이런 게 계속 고민이 돼. 대형교회의 편안함에 익 
숙해진 사람들이 과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성경이 가르치 
는 진리를 따라서 살수 있을지… 
정리하자면 십일조를 낸다고 할 때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내 
가 십일조를 안내면 너무 힘든 공동체야. 그럼 당연히 그 공 
동체에 하는 거야. 맞지? 
그치. 당연하지. 그래야지. 
또 공동체가 커. 그런데 내가 드리는 십일조가 아주 투명하 
게 잘 사용하고 있어. 
구약에서 말하는 의미에 충실하게. 그럼 그 교회에 내면 되 
는 거고. 이것도 맞지? 
그치. 충실하게 십일조의 의미를 살려서 헌금을 사용한다면 
그 교회에 내야지. 왜냐면 내가 원하는데 십일조를 하다 보 
면 내가 또 직접 그 물질로 누군가를 컨트롤 하려고 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교회가 잘하고 있으면 내가 다니는 교회 
에 내면 좋아. 그런데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교회가 잘 못하는 것 같아서 십일조 내기 싫거든. 
그럼 교회의 재정사용이 너무 성경적이지 못해서 양심이 
너무 괴로운 사람들은 어떻게 해?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충분히 부유하고 더욱이 십일조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차라리 십일조가 필요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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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11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으로 나누어 보내는 것이 더 십일조 정신에 맞는 것일 수도 
있어. 
그렇지. 십일조가 ‘십일조 정신’에 맞게 쓰여야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런 고민은 사실 대형교회 교인들이 하는 고민인 
거지. 
그렇지. 우리가 얘기한 것들은 돈이 많이 걷히고 있는 ‘메가 
처치(Mega Church)’를 대상으로 한 거지. 사실 ‘메가처치’ 
만도 아니야. 어찌 보면 자립이 가능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교회인데 헌금사용이 불건전해 보이는 교회들...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편한 자리를 포기하고 살아가시는 사 
역자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과 물질을 나누는 것은 참 아름 
답고 귀한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리고 현실적으로 볼 때, 십일조를 분산해서 내는 것이 된 
다면. 비율은 상관없는 거잖아. 
ㅋㅋ 이제 비율이나 금액 이런 거 신경 안써도 된다니깐. 본 
인의 양심에 따라 하면 되는거지. 
그럼 매번 바뀔 수 있겠네. 
그 선택에 있어서 핵심은 아까 말한 십일조 정신을 고려해 
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각자 양심에 따라 정해야 
하는 거지. 
한국 교회의 특수 상황 
정리하면 펀딩 개념으로 십일조를 냈던 사람들은 이제 마음 
을 바꿔야 하는 거구. 
또 혹시 두려워하는 사람도 마음을 바꾸면 되는 거지. 이제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면 되는 거고. 이게 진정으로 성경에 
나온 ‘십일조 정신'이니깐.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해결되었다고 치면, 이제 십일조를 
내는 것에 대해서 아까운 마음은 없어. 이미 건전한 습관도 
되었고, 구약의 십일조의 정신도 충분히 이해도 하고. 게다 
가 성경이 말하는 관계 차원의 ‘복’을 원하는 사람들인데 하 
필 교회가 잘 못하는 것 같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번째, 교회를 감시해야 돼. 교회가 헌금을 잘 사용하는지 
교인들이 감시하는 것은 교인들의 책임이야. 그런데 귀찮아 
하거든. 그런데 서로 책임지는 게 공동체잖아. 
대형교회는 공동체성이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거야. 익명성 
이 보장되구. 귀찮거든. 
그러니까 이거는 결국 신앙인들이 결단할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러네. 진짜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책임질 일은 줄어들 
긴 하지. 어찌 보면 나도 그래서 큰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일 
지 몰라. 찔리는군. 
그러니까 서비스 받는 개념인 거지. 가서 좋은 설교 한편 듣 
고 헌금 좀 내주고.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하니까 
기분도 좋구.. 
그치. 
완전히 자본주의식 방법인 거야. 이건 무슨 대형마트에서 
상품 소비하는 것과 같은 거지. 
그래서 ‘메가처치’로 다 가는 거지. 
그치 ‘메가박스’ 이용하듯. ㅎㅎ 중요한 것은 내가 교회에 더 
욱 연루되야 한다는 거야. 
서로 서로간에 책임을 져주는 게 공동체라는 거지? 교회 공 
동체도 그래야 하는거구? 
그래. 한국교회 정황이 너무 복잡해. 너무 너무 복잡한 상황 
인 거야. 어른들의 경우에는 교회가 잘못하는 걸 알아도 쉽 
게 떠날 수가 없어. 
당연하지. 
일평생 다닌 교회. 아는 사람도 다 거기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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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그간 살아온 내 인생이 다 거기 있으니까. 
그러니까 목사가 잘못된 걸 알아도 교회를 떠날 수가 없어. 
모든 게 다 거기에 있으니까. 그런 분들 같은 경우에는 목사 
가 잘못한 걸 알아도 너무 괴로우니까 그냥 모르고 싶은 거 
야. 눈과 귀를 닫아 버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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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어른들은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런 분들을 구태여 
우리가 가서 들쑤실 필요는 없어. 
젊은이들은 다르지. 목사님이 계속 십일조는 자기 교회에 
내야 된다고 그래. 난 솔직히 그런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거 
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 악한 방향으로 계속 물질이 쓰일 
거 아니야? 
오케이. 나도 같은 생각이야. 
오히려 그럴 때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어떻게 이것을 사 
용해야 할지를 고민해야지. 
그런데 계속 말하지만 고민을 안 할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거야. 그리스도인은 고민을 해야 돼 
그래 인정. 또 찔린다. 
하나님 곁에 갈 때까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야. 고민하길 포기하는 
건 타락의 지름길이야… 
정말 좋은 목사 만나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런 목사들이 많지 않아…ㅎㅎ 
사실 정말 신실하게 사역하면서도 경제적으로 힘든 사역자 
들이 주위에 보면 많거든. 이런 분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 
는 거야….지속적으로… 
선교적 차원에서 지속성(sustainability)이 참 중요하거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 감정적이서 줄 때는 확 줬다가도 식 
으면 또 확 빼거든. 이건 문제야. 
난 목회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세상 속에 있는 성도니 
까. 근데 구약의 의미대로 쓰일 수 있다면 우리가 누굴 도울 
지 잘 모르니까…대형교회 목사들이 농어촌의 작은 교회 
들을 후원하면 좋잖아. 물론 하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좋지. 근데 안타까운 건 너무 홍보용으로 하는 거야. 교인들 
보여주려고 찔끔찔끔… 
맞아. 나도 그렇게 느껴지더라구. 모 극단적인 비유지만 큰 
교회에서 1,000명한테 10원씩 나눠주면 받는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지. 1,000명한테 줄 거를 차라리 100명한 
테 1,000원씩 주면서 실제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실어주는 
게 더 의미 있는 거 아닌가? 물론 1,000명한테 주는 게 나쁘 
다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해줘야 맞는 거잖아… 
나도 이번에 준비하면서 알았는데 어떤 교회는 십일조가 15 
만원이 안 되는 교인한테는 교회에서 십일조를 환급해준데… 
잉? 무슨 말인지? 
정부도 세금을 환급해주는데 하물며 교회에서도 환급을 못 
해줄 이유가 없다는 거지. 
일단 교인들이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것은 받는데..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리던 분들한테 갑자기 십일조 내지말라고 하면 
마음이 불편하니까…그런데 십일조가 15만원이 안 되는 교 
인들은 한달 월급이 150만원이 안 되는 거잖아…그러니까 
그분들한테는 다시 십일조를 환급해 주는거지. 멋있잖아… 
자! 그럼 다시 돌려받았다고 치자. 그럼 그 돈을 또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하게 될거아냐? 헌금 돌려받은 거니까 아무 
렇게나 쓰지는 않지 않을까? ㅎㅎ 
근데 그 돈으로 가족끼리 외식을 해도 그건 십일조 정신에 
맞는 거 아닌가? 
그래 맞아. 십일조 정신에 맞는 거지. 
돌려받은 돈으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면 난 마음은 
불편할 것 같다. 공돈 생겼다 내가 낼게 이러진 않을 것 같아. 
ㅋㅋ 어떤 분들은 그 돈으로 컴패션이나 그런 단체들을 통 
해서 더 가난한 사람들을 후원하는 거지. 그러니까 방법론 
에 대해서는…우리가 어떻게 십일조 정신을 이 시대에 적용 
할 것인가는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거지. 맞다 틀리다 
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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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13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사실 교회에 헌금종류가 많은 것도 좋은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온 건데. 처음 생길 때는 나쁜 의도로 생기지는 않았을 거 
란 말야…건축 헌금도 처음부터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었기 때문에 악용되는 부분 
도 있고.그러니까 이제는 좀 더 창의적으로, 사실은 헌금에 
서 십일조란 명목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거든. 
그러게 교회 헌금 종류가 왜 그리 많아? 헌금 봉투 인쇄값만 
해도 꽤 들겠어 ㅎㅎ 
사실 요즘 헌금 종류가 많아진 건, 미안하지만 교인들에게 
돈을 뽑아내려는 그런 목적도 많았을 것 같아. 솔직히 그래 
보이잖아. 그러니까 교회 헌금은 심플해야 돼. 어떤 교회는 
교회에 주보에 다가 십일조 낸 사람 이름을 적어. 
어떤 교회는 이름도 불러준다던데. 
내가 그런데 까지는 못 봤는데 이름 적는 교회는 좀 봤거든. 
어떤 성도는 헌금 냈는데 주보에 안 실리면 교회 사무실에 
와서 따진단 말야. 내가 냈는데 왜 주보에 이름이 안 나왔냐? 
이러면서. 그런데 주보에 이름을 안 적으면 헌금이 확 준데. 
현실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너무 강한 거야. 
그런데 원래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헌금은 그냥 교회 
공동체를 위한 거야. 그냥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만큼 최선 
을 다해서 드리면 되는 거지. 오일조도 좋고, 십일조도 좋구 
십이조도 좋구. 
ㅎㅎ 그러면, 세전 세후냐 이런 것도 의미가 없는 거네. 
당연, 당연히~~ 아무 의미 없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 많이 버는 사람은 십 분의 오도 
드릴 수 있구…십분의 구를 드릴 수도 있는 거구. 반면에 돈 
을 너무 못 벌면 드릴 수 있는 만큼 정성을 다해서 드리면 되 
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안 드리는, 아니 못 드릴 수도 있는 
거지. 이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거야. 
돈이 없는 사람, 도리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머리 
속에 십일조를 꼭 내야 된다고 세팅이 된 사람들한테는 아 
까 언급했던 교회처럼 십일조를 돌려주는 시스템도 방법인 
것 같고. 여하튼 방법은 우리가 창의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에게 주신 상상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지. 
오케이 좋아. 그런데 좀 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얘기하자 
면 어떤 교회에 들어가서 꾸준히 헌금을 냈어. 결국 내가 
교회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져. 이게 성 
경적인 건가? 
예를 들어서 교회 주차장은 교인들만 사용할 수 있어. 그리 
고 외부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어. 이게 성경적인가? 
사실,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지. 근데 한국교회가 많이 그래 
왔잖아. 한국교회가 성경대로 살아왔다면 개독교네 뭐네 욕 
먹을 필요가 없겠지. 
우리가 늘 하는 말이지만 내가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지 않 
고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국교회의 현상만을 봤다면 
나도 극단적인 안티 기독교가 되었을 것 같아. 굉장히 
냉소적인 시각을 가진 100% 안티.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말씀으로 들어가 보니까 성경이 가 
르치는 기독교는 그게 아니더라구.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보는 거지. 물론 한국 교회에서도 말씀대로 가려고 분투하 
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고 믿어. 그런데 그런 분들은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아! 그리고 분당에 사는 류모자매가 질문을 전해달 
라는데 ‘온전한 십일조’란 말이 왜 나온거야? 정확하게 10% 
따악 내라는 거야? 모야? 
‘온전한’ 이라는 말은 구약 말라기 3장 10절에 나오는 표현 
인데 원래 히브리어는 ‘모든 십일조’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모든 십일조를 목적에 맞게 사용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사용된 표현이야. 십일조 정신에 맞게 사용하라는 거지. 
따라서, ‘온전한’ 십일조는 정확하게 10퍼센트를 내라는 의 
미가 아니라 십일조의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라는 거지. 
그러면 한 교회에 10프로를 전부 내야 하는 질문도 무의미 
한거네. 
사실 그렇게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되게 너무 복잡한 일이 
되는 거지. 십일조 하나 낼라고 세무사를 따로 둬야할 지경 
이 될수도 있어. ㅎㅎ 예를 들면 어떤 집은 아버지가 월급을 
받아서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돈에서 엄마한테 생활비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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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14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셨어. 그러면 엄마는 생활비에서 또 십일조를 하고, 남은 
돈으로 애들 용돈을 줬어. 애들은 또 그 돈으로 십일조를 해. 
‘온전한’ 십일조 낼라면 계산기 무지 두들겨야 할걸. 
크큭. 그렇네. 우리나라만 이렇게 열심히 내는 것 같아. 
아냐. 미국의 보수적인 교회들도 십일조는 열심히 하고 
있어. 계속 강조하지만 십일조가 의미 없는 건 아니니깐. 
십일조의 폐해 때문에 그런거지. 숭실대의 조성기 교수님이 
<십일조는 없다>라는 책을 쓰시기도 했거든. 그런데 그분 
이 주장하는 거는 극단적으로 헌금 내지 말라 이런 건 절대 
로 아니고 “구약의 십일조라는 형식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의 사역으로 끝났다.” 그러니까 성경 정신에 입각해서 연보 
해라 이런 거지. 
그런데 이 책을 비판한 분도 있잖아 
맞아. 총신대 김인환 교수님 같은 분은 이 책을 비판했어. 그 
런데 넓은 의미에서 보면 두 분이 다른 얘기를 하는 거는 아 
니야. 두 분 모두 성도가 마땅히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서 하 
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맞는데, 한쪽에서는 십일조라는 
형식이 아직 유익하다고 보는 거고, 한쪽에서는 십일조라는 
형식은 필요 없다라고 보는 거지. 여기에 대해서는 입장차 
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예배와 이웃을 돌보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 
고 인정하는 정신은 다 좋다는 거야. 
그런데 이 정신을 어떤 형식에다 담을 것이냐 십일조라는 
형식을 가져다 쓸 거냐 아니면 이 시대에 맞는 다른 형식에 
담을 거냐 여기에는 누가 맞다 라고 말하기에 애매한 부분 
이 있는 거지. 
그래 그건 동감이야. 
중요한 건 계속적으로 오늘 반복하면서 강조하는 거지만 ‘ 
십일조 정신’이라는 거지.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은 한국교회가 잘못했으 
니까 그런 거구. 그러니까 이제 잔 걱정들에서는 자유로워 
졌으면 좋겠어. 
오케이. 알겠다. 우선 나부터 좀 자유로워졌다. 그러면 NGO 
나, 시민단체에 십일조 내도 되는 건가? 교회가 아닌 단체에? 
넓은 의미에선 괜찮지. 우선적으로는 예배와 믿음의 공동체 
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우린 모두 지 
구촌 한 가족이니까. 공동체나 약자보호 차원을 확장하면 
NGO나 시민단체를 돕는 것도 해당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크리스챤은 크리스챤한테만 해야한는 거 아냐? 
십일조 혜택의 대상인 ‘객과 고아와 과부’라고 할 때 객은 
나그네거든. 요즘으로 치면 외국인 노동자쯤 될까? 이 사람 
들은 꼭 하나님 백성이 아닐 수 있어. 
그러니까 교회의 사명이 뭐냐고 했을 때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비춰주는 건데. 이 빛을 무엇으로 비출 것인가? 
할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안하세요, 기도할게요”라고 말 
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뭔가 가야 된단 말이지. 이 
걸 원래 교회가 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 
교회가 지방에 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체육관을 지어주는 건? 
그 지역주민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그 체육관을 지방에 있는 복음적인 교회가 운영할 수 있도 
록 연결해준다면 더욱 좋겠지. 
크리스챤이 아니라도 체육관을 막 써도 된다는 거지? 농구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럼 당연하지. 
이제 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어. 
가령 요즘에는 교회들이 지역 학교에 강당을 지어주고 그 
강당을 주일만 임대해서 쓰기도 하거든. 
이게 다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 정신에 입각한 게 아닐까? 
예배, 약자 보호,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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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핵심은 
'십일조 정신'에 따라 행동하기 
황코치는 15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그 범위를 어디까지 적용할까 생각해볼 때 십일조로 아프리 
카 사람들 도와주는 것도 참 좋은 거고. 
그게 교회답고 기독교다운 거니까. 객이 내 앞에 있는 사람 
만 객이 아니니까. 
내가 알고 있고, 믿는 기독교는 성경얘기 구태여 안해도 
성경이 가르치는 정신대로 살면 사람들에게 충분히 존경 
받을 수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원래 초대 교회가 보여준 기독교가 그런 거잖아. 
소수에 불과했던 초대 교회가 생존하고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의 삶이 완전히 달랐거든. 사랑을 했거든. 아무 
조건 없이 사람들을 섬겼거든.. 한국교회가 그 힘을 많이 
잃어 버린 거지. 
흠… 다시 그 힘을 찾을 수 있을까? 
너무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신실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크리스챤 
들이 모인 소수의 공동체, 소수의 교회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면 조금씩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우리부터 잘해야지..ㅋㅋ 
흠… 그래, 오늘 나눈 이야기 무지 유익했다. 앞으로 자주 
보자구. 신목사. 
그래 황코치 다음엔 또 무슨 주제를 해야되나? 하도 떠들었 
더니 이제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목사가 쏠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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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코치는 16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FIN 
Special thanks to 
BLiss & Ryu 
내용 문의나 신앙상담은 언제든지 
아래 이메일 주소로 남겨주세요. 
word1st@naver.com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아둘람공동체교회 
Adullam Community Church 
Copyright 2014 A dullam Communit 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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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정신 20141215

  • 1.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 십 일 조 편 -
  • 2.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를 내는 두 가지 이유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 율법(십일조)의 내용과 형식을 짚어보자 율법의 목적 십일조는 왜 존재하는가? 오늘날의 십일조는 율법의 형식이 아닌 정신을 살려야 한다 십일조, 뿌린 만큼 거둔다? 이게 성경적인 거야? 한국교회 십일조의 특수성 십일조 정신에 맞는 진정한(?) 십일조 사용하기 한국 교회의 특수 상황 다시 한번 핵심은 '십일조 정신'에 따라 행동하기 황코치 > 경건의 모양은 없으나, 열심도 없는 모태신앙 크리스찬. 하지만, 한국교회에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 다수 중 하나. 주된 활동분야는 커뮤니케이션 전문 코치. hwangcoach.co.kr 신목사 > 조용한 양평에서 무명, 불편, 환대를 추구하며 아내와 아들 넷과 함께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을 소통하기 위해 실험 중인 목사. 주된 관심은 건강한 신학의 대중화. 십일조 편
  • 3. H S H H S H H H S S S S 십일조를 내는 두 가지 이유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 어이 신목사,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십일조 이거 꼭 내야 되냐? 그보다 내가 먼저 물어볼게. 넌 왜 교회에 십일조를 내냐? 흠…모 교회에서 내라고 하니깐? 또 성경에 써있잖아. 십일조 내라고 그렇게 따지면, 교회에서 지키라고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솔직하게 넌 십일조를 왜 내냐? 인간적으로 까놓고(?) 말해보자. 솔직히 예전에는 목사들이 십일조 내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일종의 투자 개념으로 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지. 내가 한 달에 백 만원 버 는데 십만원을 십일조 하니까 나중에 연봉도 많이 오르고, 보너스도 받으면 좋겠다는… 크크 물론 난 점잖은 신앙인이 니 대놓고 기도제목으로 내놓지는 않지만 그런 속내가 있는 거지. 또 한편으로 십일조 안내면 벌 받을 것 같으니까 보험 같은 느낌으로 낸 것도 있구. 이런 거 있잖아. 내가 십일조 안내서 지난주에 교통사고 난 거 아냐? 아님 가족 중에 누가 아픈 거 아냐? 모 이런 거지. 불확실한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지금은 그런 생각보다 십일조 가 좋은 일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십일조 자체를 드리는 건 오케이인데, 교회가 십일조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서 십일조 내고 싶지가 않아 일단 니가 한 말에는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모두 있는 것 같아. 첫 번째 입장은) 교회에서 십일조 잘 내면 복주고 안내면 벌받는다고 가르치니까 벌받기 싫고 이왕이면 복 받고 싶어 서 내는 거야. 한국의 교인들한테 이런 생각이 아주 강한데 이건 좀 변화가 필요하구. 두 번째 입장은) 십일조 내는 것 자체는 좋은데 교회가 십일 조를 엉뚱한데 쓰니까 자꾸 자기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게 아 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데, 이건 기본적으로 교회의 잘못이 거든.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두 가지 입장에 대해서 다 한번 얘기해 보면 좋겠어. 福 좋아. 우선 사람들이 복을 받고 싶고 저주를 받기 싫어서 십 일조를 내는데 너는 도대체 복 받는다는게 뭐라고 생각해? 뭐 일단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복 받는다고 하면 물질적인 축복이나 건강, 승진 이런 거를 생각하지 않을까? 그럼 너는 복을 받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하하. 생각해보니 나 역시 속물이라 뭐 사건 사고 없고...돈도 많이 벌면 더 좋구... 속물이라기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복을 참 좋아하잖아.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복’에 물질적인 번영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복’ 개념과는 좀 달라. 성경이 말하는 ‘복’은 기본적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 만족스러운 상태거든. 우리가 돈을 좋아하지만 사실 우리가 돈 자체 때문에 행복한 건 아니잖아. 내가 사람들한테 종종 하는 질문이 천억 가지 고 무인도에서 혼자 살래 아니면 돈 많이 없어도 사람들이랑 어울리며 같이 살래? 하는 거야. 그러면 열이면 열 모두 돈 없어도 사람들이랑 알콩달콩 같이 살고 싶다고 해. 그렇게 돈타령을 하면서 정작 사람을 택해. 왜냐면 돈 자체가 우릴 행복하게 해주는 거는 아니거든. 돈 이 우리의 관계에 도움이 될 때 행복한 거지. 성경을 보면 인간은 본래 ‘관계적인 존재’야.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 속에서 안정감도 찾고 기쁨 도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거지. 황코치는 1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4. H H S H H H H S S S S S 율법(십일조)의 내용과 형식을 짚어보자 자~ 그렇다면 우리가 받고 싶어하는 ‘복’은 뭐냐? 관계를 깊고 풍성하게 해주는 게 바로 ‘복’이야. 사실 성경이 말하는 ‘죄’ 라는 것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 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거거든. 죄로 인해 하나님과 소통이 안 되는 상태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거고.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소통이 다 시 이루어지고,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소통되는, 이게 진정한 행복이거든. 우리는 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잖아. 같 이 무언가를 공유하고, 함께 무언가를 즐기고 나누고. 정리하자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핵심도 회복된 관계에서 오는 편안하고 행복한 기쁜 상태인 거지. 물질을 많이 소유 하는 것 자체가 ‘복’은 아닌 거야. 그래서 성경에서 ‘복’을 준 다는 의미도 그런 게 아닌 거지.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어떤 물질적인 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 고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거다? 그렇지. ㅎㅎ 하나님과 인간관계 뿐 아니라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되는 거지. 그게 복이다? 그럼, 이게 복이고 복음(gospel)인거야. 오케이 클리어하구만. 관계를 중심으로 복을 이해하는 게 성 경적인 개념이라는 거지. 그렇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에 대한 잘못 된 개념을 바꿔야 십일조 관련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접근하면 이제 문제를 다시 풀 수 있겠네. 그럼 다시 십일조로 돌아가서 도대체 십일조는 왜 내야 되는 거야? 십일조를 왜 내야 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이 왜 십일 조를 포함한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그래 맞아. 구약의 율법은 지금도 지켜야 되는 거야? 어떤 건 안 지켜도 된다고 하고 어떤 건 지키라고 하고 어떤 게 맞는 거야? 예를 들면 뭐 ‘번제’ 이런 거는 이제 안 지켜도 되는 거 잖아? 현실적으로도 당장 이런 거 할라면 119 출동하고, 장난 아닐걸. ㅋㅋ 지금 니가 말한 문제는 구약의 율법을 신약시대인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좀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우선, 신학적으로 봤을 때 구약에서 요구하 는 모든 제사들과 모든 율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이 됐어. 이제 완전히 끝이 난 거지. 일단 제사만 보면 모든 제사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희생 제물이 되어서 자기 몸을 드리셨기 때문에 완전히 성취된 거야. 원래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거였거 든. 아까도 ‘관계’의 중요성을 얘기했는데 ‘제사’는 죄로 인해 서 하나님과 소통(관계)이 끊어진 상태가 된 인간이 다시 하 나님과 연결이 되고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었단 말이야. 근데 이게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제사라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됐거든. 신약교회의 특권이 성령 안에서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는 예배를 드릴 수 있 는거거든. 율법에는 형식과 내용이 있는데 신약 시대에는 형식은 사라 지고 그 내용만 살아남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율법의 형식 들은 ‘무효’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율법의 내용과 정신은 신약에도 살아남는데 율법의 정신을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시거든. 구약의 모든 율법의 정신을 압축한 것을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십계명의 정신을 예수님이 다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셨단 말야.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라는 율법의 ‘정신’은 오늘날도 유효한 거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게 굉장히 중요해! 2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5. H H 오케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구약의 율법은 완성이 됐다. 그래서 구약 율법의 형식적인 것들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하지만 구약의 정신,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지금도 지속된다. 정도로 정리하면 되겠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외우기 좋네. ㅎㅎ 우리가 율법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게 하나님이 도대 체 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나 하는 그 이유야. 하나님이 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실까? 잘 지키나? 안 지키나? 체크할라 고? 글쎄 그건 생각을 안 해봤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행복’ 을 위해서야.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어. 첫째로) 율법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에 게만 의미가 있어. 사실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율법이라는게 의미도 없고 강제성도 없는 거야. 율법이 무엇이냐고 할 때 율법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 이거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한테나 내 말만 들어라 하지 않으시거든. 예를 들어서 나는 내 아내한테 "당신 내 말 들어야 돼" 라고 말할 수 있는 거거든. 내 아내니까 내 여자니까. 내가 다른 여자한테 가선 그런 얘기 안한단 말야. 특별한 관계니까 특 별한 요구를 할 수 있는거지. 하나님도 자신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들’한테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백성 이었다면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 새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들이 언약백성이거든.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들어야 하는 거지.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거야. 이 내용이 정말 중요해.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는 건 그래 야 우리가 행복해지기 때문이야. 십일조를 포함해서 구약에 나오는 모든 율법은 결국 우리를 위한 거야. 율법을 지켜서 이익을 보는 쪽은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인 거지. 생각해봐.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살인하면 누가 손해야? 내가 누굴 죽였어. 이게 하나님한테 어떤 타격이 갈까? 남을 죽이고 나면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 운 거야. 나머지도 마찬가지야.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내가 파 괴되고, 내가 간음하면 나와 우리 가정이 파괴되는 거야. 그 런데 인간은 죄성 때문에 자꾸 죄를 짓고 싶어하니까 하나님 이 우리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거란 말이지. 결국 율법을 왜 주셨느냐?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행복해지라고 주신 거야. 우리가 이런 차원에서 율법을 이해해야 돼. 셋째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는 기쁨이자 영광이 돼. 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잖아. 우리도 부모라서 알지만 사랑 하는 자녀들이 행복해 할 때 부모는 더 행복해 지거든. 존 파이퍼 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셨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해 할 때 우리로부터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 안에서 행복해 할 때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행복해하신 다는 거야. 이게 우리 아버지라는 거지.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를 기뻐 하시기 보다는 우리가 행복해 할 때 기뻐하신다는거지. 하나 님이 우리한테 좋은 선물을 주셨어. 그런데 우리가 그걸 받고 너무 기뻐하고 좋아한단 말야. 이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한테 는 너무 큰 기쁨이 된다는 거야. S S 율법의 목적 3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6. 십일조는 왜 존재하는가? 이제 우리도 아빠가 되었으니 이해되지 않냐? 하하 그래 아빠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이해되는 군. 물론 100%는 아냐. 난 아직도 내 딸 선물보다 나한테 주는 선물 이 더 좋아. ㅎㅎ 크크 다행이 하나님은 너와 좀 달라. ㅎㅎ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생각해보자구. 하나님이 치사하게 십일조 안 냈다고 삐지시고 벌주시고 이런 분이 절대로 아니거든.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치사하고 째째한 분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 한번 생각을 해봐. 까놓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릴려고 자기 아들을 주신 분이야. 그런 분이 치사하게 우리 돈 몇 푼 받겠 다고 복주고 안주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이해 자체가 굉장 히 잘못된 거야. 내가 백 만원 내야 되는데 몇 만원 덜 냈다고 벌주고 좀 더 내면 괜히 더 챙겨주고. 절대로 이런 분이 아니라는 거지. 다행이다. 나랑 다르셔서. ㅎㅎ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결국에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거다. 자녀인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행복해하는 것을 보시면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니까. 십일조 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거네. 그렇지 그런 거지. 좋아 이제 그럼 본격적으로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십일조는 뭐고 왜 내야 하는 거야? 우선 십일조도 구약의 율법 중 하나야. 구약 성경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이 나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서 얻게 된 소득 의 십 분의 일을 성전으로 가져가서 제사 업무를 담당하는 레위인과 제사장에게 가져다 바쳐야 됐어. 레위인과 제사장 들은 농사를 지을 땅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준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지금은 레위인도 없고 제사장도 없잖아. 가끔 이상한 목사들이 목사가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그건 미 안하지만 정말로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소리거든. 이제 우리 의 유일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어. 그리 고 예수님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 에 이제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서의 십일조는 다른 제사들 처럼 이제는 끝났다고 볼 수 있어. 그럼 이제 십일조는 안내도 되는 거야? 그럼 교회에선 도대 체 왜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거야? 지금 한국 교회에서 십일조를 내는 문제는 좀 복잡하니까 우선 십일조의 내용, 십일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다음에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케이. 일단 접어두고. 그럼 ‘십일조’라는 율법의 목적이 도대체 뭐야? 우리가 어떤 것의 용도를 보면 그 목적을 알 수 있잖아. 가령, 볼펜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볼펜의 목적을 알 수 있고, 자동차의 용도를 알면,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십 일조의 목적을 알려면 구약시대에 십일조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보면 돼. 구약시대에 십일조의 용도는 크게 세 가지였어. 첫째) 십일조는 예배를 위해서 사용됐어. 레위인들이나 제사장이 했던 일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거든. 요즘으로 하면 레위인들은 예배 책임자들이었 던거지. 그런데 이 사람들이 땅이 없었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12지파가 기업으로 땅을 분배 받는데 이 때 레위인들한테는 땅이 기업으로 분배가 안돼. 당시에는 반드 시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 수 있는데 레위인은 땅이 없는 거야. 왜? 레위인의 기업은 하나님이라는 거지. 그 러니까 하나님이 나머지 12지파 사람들한테 십일조를 내서 레위인들을 먹여 살리게 하신 거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는 H H S S H H S S ? ? ? ? 4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7. 십일조로 제사를 담당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유 지할 수 있게 하고 남은 것은 보관했다가 예배나 성전 유지 에 필요한 것을 구입하는데 사용했던 거지. 여기서 갑자기 생뚱 맞은 질문하나. 12지파가 아니라 14지 파였다면 십일조가 아닐 수 있었을까? ㅎㅎ 그건 아닐 것 같아. 십일조의 기원이 12지파에서 시작된 게 아니거든.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전투에서 이기고 와서는 살렘왕 멜기세덱한테 십일조를 드리거든.(창14장) 더욱이 십일조 는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관습이 아니야. 고대 근동지역의 나라들에서는 자기 신들에게 제물을 드릴 때 십일조를 드리 는 풍속이 있었어.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드린 십일조 는 아주 독특한 의미가 있었어. 똑같은 형식이지만 그 내용 과 의미가 완전히 달랐던 거지. 이게 십일조의 두 번째 용도 와 연결이 돼. 둘째) 십일조는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 었어. 신명기를 보면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모아서 객, 고아,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먹이는데 쓰도록 하거든. 이게 당시 다른 나라에서 드린 십일조와 매우 다른 부분이 야. 다른 나라의 경우 보통 십일조는 신에게 드리는 거였거 든. 그런데 성경에선 십일조를 약자들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하 는 거야. 멋지지 않냐? ㅎㅎ 그리고, 레위인이나 제사장도 사회적 약자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어. 당시의 상황이 현재와 완전히 달랐단 말이지. 요즘처럼 사회보장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는 경작할 땅이 없으면 그냥 굶을 수 밖에 없는 거야. 땅이 없으면 당장 생존이 불가능하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거지. 성경에서 특히 고아와 과부나 객이 사회적 약자로 간주되는데 요즘처럼 일용직이라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 부모님 없는 아이들. 또 여자들. 당시는 여자들이 일거리를 얻을 수가 없었거든. 그런 사람들은 구 걸하거나 굶어야 되는 거야. 셋째) 십일조는 공동체를 위해 사용됐어. 신명기 14장에 나오는 십일조 규례를 보면 십일조의 정신에 대해서 잘 나와있어. 요즘에는 월급을 받아서 일년에 십일조를 보통 12번을 하잖아. 그리고 보너스를 받거나 돈이 생기면 또 거기서 10%를 하구. 그런데 예전에는 농사지었으니까 일년에 한 번 수확을 한단 말야. 그러면 그 중에서 십 분의 일을 하나님 이 정해두신 성막이나 성전으로 가지고 가라는 거야. 그런 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가지고 간 십일조를 제사장과 가족 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거야. 여기서 잘 생각해봐야 할게 뭐냐면 당시는 요즘처럼 잘 사 는 시대가 아니야. 굉장히 힘들게 농사를 짓고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함께 나눠 먹는 거야. 일종의 잔치네. 잔치. 그렇지. 잔치야. 더 재미있는 것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은 수확물을 가지고 가기 힘들잖아. 그러니까 그걸 돈으로 바꿔서 돈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성전 근처에 가서 마음에 원하는 것을 사라는 거야. 그런데 그 살 수 있는 품목이 재미있어. 소나 양이나 포도주 나 독주나 마음에 원하는 것을 모두 사라는 거야. 독주도? 엉 그래. 그런데 당시에는 무슨 화학적인 술이 아니니까 발효주인거지. 영어 번역에는 독한 술(strong drink) 또는 발효주(fermented drink)라고 번역이 되어있어. 암튼 술을 포함한 모든 원하는 것을 사가지고 하나님 앞으 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게 바로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이었어. 일년 동안 열심히 일한 소출 중에서 제 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과 가족들이랑 함께 나누 어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거야. 그러니까 일년에 한번 하는 파티네. 페스티발이지. 절기는 우리 추석같은 명절인 거야. 감사절과 같은 거네. 그렇지. 너무 감사한 축제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십일조는 나눠 먹는 거야 공동체가 함께. H H H H H S S S S S 황코치는 5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8. 그런데 한번에 다 먹지는 못할 거 아냐. 그러면 저장해 놨다 가 제사나 성전유지에 필요한 일에 사용하는 거지.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매 3년 째 십일조는 성전으로 가 지고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성읍에 저축을 해서 마을에 있는 약자들을 먹이는데 쓰라는 거야. 지역 사회의 약자들을 보 호하는 복지의 기능을 위해서. 이것도 사실은 공동체를 살 리기 위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겠다 고 약속을 하시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복’도 무슨 떼돈을 벌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게 아니라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겠다는 거야. 일한 만큼 손해보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거지. 자본주의 사회가 돈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까 ‘복’하면 무슨 떼돈을 부어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처음 시작할 때도 말했지만, 그런 개념이 아니고, 굳이 물질적인 부분으로 접근을 한다 해도 언제나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만큼 거기에 부어주시는 ‘복’으로 이해해야지. 자~ 여기서 구약의 십일조가 쓰인 용도를 정리해보면 첫째,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유지함으로 예배를 위해서 사용되었고, 둘째, 사회적 약자들인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 해서 사용되었고, 셋째,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됐다 이거지. 그런데 어쨌거나 이미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율법의 형식은 폐기가 된 거잖아. 구약의 십일조가 지금 우리가 십일조를 내는 거와 어떤 상관이 있는 거야? 오늘날의 십일조는 율법의 형식이 아닌 정신을 살려야 한다 아까 말한 것처럼 율법의 형식은 이제 필요 없지만 율법의 정신은 살려야 되거든. 문제는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신약 시대에 어떻게 계승할 수 있는가 하는 건데. 교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초창기에는 십일조가 아예 없었거 든. 그런데 중세 때 다시 십일조 제도가 부활을 해요. 이게 십일조 정신을 어떻게 살려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다시 구약의 형식을 가져온 거지. 그러니까 처음에는 십일조가 없다가 다시 생겼다는 거야? 응. 사실 신약 성경을 보면 십일조라는 말이 한번도 안 나와. 그래? 신약에 십일조라는 말이 안 나온다고? 복음서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있어. 그런데 모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형식적으로 드리는 것에 대해 비난하시기 위한 맥락에서 나와. 또 히브 리서에서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내용 중에서 아브 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내용이 언급되는 정도 야. 이 내용들은 결국 구약의 십일조 관행에 대한 거라고 볼 수 있어. 실질적인 초대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는 사도행전이나 서신 서에는 십일조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나오질 않아. 그럼 초대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아예 안 했던 거야? 응. 십일조는 안 했어.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십일 조를 포함한 모든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단 말야. 그러니까 교회에서 무슨 헌금 내라 이런 얘기를 안 했어.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모이면 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밥도 먹고 그랬던 거지.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근으로 굶는다는 소식을 들었 어.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우리 형제자매들이 힘드니까 우리 돕자 그런 거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약자와 공동체를 돕는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계승한 ‘연보(捐補)’를 했어. ‘연보’가 뜻이 뭐야? ‘연보’는 한자어로 버린다, 준다는 뜻을 가진 ‘버릴 연(捐)’자 와 옷을 깁는다고 할 때 ‘기울 보(補)’자를 쓰는데 ‘주어서 보충한다’라는 뜻이야. 쉽게 말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기부금과 같은 거야. H H H H H S S S S S 황코치는 6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9. 한글 성경에는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에 ‘연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도 바울이 교인들한테 편지를 써서 한번에 연보 를 하려면 부담될 수 있으니까 미리 모아두었다가 방문했을 때 가져갈 수 있게 해라 그러거든. 이런 의미에서 ‘연보’일종의 구제기금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공동체를 살리는 십일조 정신이 새롭게 적용된 거라 고 볼 수 있지. 사도 바울 입장에선 자기가 쓰는 게 아니니까 더 적극적이 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거지. 근데 위험하긴 하네. 성경의 어떤 특정 구절을 말해서 이익 을 탐하는 교회를 철저한 기업 마인드로 ‘운영(?)’하시는 ‘목 사CEO’들께서 이 구절을 이용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래서 교회에 목사 외에도 장로나 안수집사나 있는 거야. 견제가 필요하거든. 교인들이 낸 물질을 제대로 사용하는가 감시하는 거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교회나 국가 나 똑같아. 그래서 목사의 가장 큰 기능은 말씀사역을 하는 거구 돈과 관련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 돼. 원래 집사가 왜 뽑혔냐 면 교회의 돈 관리하고 구제하려고 뽑은 거거든. 사도행전 에서 처음에 사도들이 구제까지 함께 하려니까 문제가 생겼 거든. 그러니까 사도들이 우리는 이제 말씀과 기도에 집중 하겠다. 그러니까 이제 믿을만한 분들을 여러분이 뽑아서 그분들에게 돈이나 구제를 맡기자는 거야 십일조나 이런 것도 원래 목사가 관여할게 아니네. 당연하지. 원래 건강한 교회들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건물 짓느라고 망조가 난 거지. 대출받고...ㅎㅎ 그렇지. 또 다른 문제지만 성도들도 마음에 안 드는 거지. 한국 교회가 욕먹는 이유도 이거지 뭐. 십일조 문제도 걷어 들인 이 돈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잖아. 일단 교회 안의 약자들을 돌본 다음에 그래도 남는다면 이제는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거나 외부로 흘렀으면 한국 교회가 이렇게 욕을 안 먹고 지역사 회에 도움이 되고 존경 받을 텐데. 그렇지 그게 성경적인 거구. 그렇지. 그런데 그게 안된 거구. 교회가 너무 탐욕스럽게 자 기들의 왕국을 확장시켜 나간 거지. 대기업 확장시키듯이 이게 망조가 된 거지. 우리가 잘 아는 교회들도 계속 건축을 했잖아. 심지어 지었다가 부수고 또 짓고...결국 빚지고. 그 런데 우리 어른들 세대에는 이게 통한거야. 일단 눈에 확 보 이니까. 목사가 "여러분이 드린 헌금으로 이 건물을 지었습니다." 라고 하면 성도들은 “우와 대단하다.” 이러는 거지. 눈에 보이니까. 갑자기 욱하는 군. 그러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제 십일조 는 안내도 되는 건가? 쉽게 말하긴 어려운데 그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성경적으로 볼 때 이제 ‘십일조’라는 이름의 헌금은 안내도 되지만 반면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십일조 정신’은 변하지 않았거든. 쉽게 얘기해서 내 통장에서 지출되는 돈의 액수는 ‘십일조’ 라는 이름으로 낼 때나 안낼 때나 똑같을 수도 있고, 도리어 성경적 정신에 더 충실하게 물질을 사용한다면 십일조보다 더 많은 돈이 나갈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십일조라는 명목 으로는 교회에 안내도 괜찮은 거지. 그런데 아직도 한국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 하는 것으로 강조하잖아. 사실 한국교회에서는 십일조는 주일성수와 함께 신앙의 핵 심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문제가 있는 거지. 일단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율법은 완성되었다고 본다면 십일조 도 이미 끝난 거야. 이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범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 에 충실한 삶을 살면 되는 거지. 자! 그렇다면 그럼 그 구체적인 방법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교회 역사를 보면 이걸 예전 사람들도 고민했단 말이지. 이 방법을 고민하면서 다시 성경을 보니까 구약에서 가져올게 있던 거야. 이미 구약의 율법이 형식적으로는 완성된 것을 알지만 실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어 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까 고민하는 중에 구약 H S H S H S H S H S H S 황코치는 7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0. 율법 중에 하나인 ‘십일조’가 다시 등장한 거지. 구약의 내용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신약의 정신을 담는 구약적 형식으로 사용하게 된 거라고 볼 수 있 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적용하는 형식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십일조’라는 형식은 그냥 그대로 다시 가져다가 쓴 거라고 봐야지.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것 같아. 십일조, 뿌린 만큼 거둔다? 이게 성경적인 거야?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심하게 변질되지 않았나? 요즘도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를 일종의 ‘펀드’ 개념으로 생각하잖아. 그치. 십일조 했는데 기대한 것만큼 수익(?)이 안 좋으면 서 운하고. 이런 마음으로 십일조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십일 조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하나님을 원망한다구. 내가 얼 마나 열심히 드렸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하면서. 펀딩을 열심히 했는데 망한 거지. 게다가 안 좋은 일까지 생기면 따지려고 하겠지. 후후 그러니까. 까놓고 얘기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거거든. 처음부터 하나님이 다 주셨어. 생명도 주셨고 우릴 구원하 시려고 아들까지 주셨어. 우리를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까 지 다 주신 분이야. 우리가 이걸 받은 게 은혜거든. 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거야. 기독교가 다른 종 교와 다른 점이 뭐냐면 다른 종교는 인풋(input)만큼 아웃풋 (output)이 나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거지. 내가 100을 하면 100이 나오고 200을 하면 200이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게 주어지는 거야. 이게 일반 종교의 메카니즘이거든. 그런데 기독교는 이게 아니야. 우리가 인풋(input)하기 전에 우리한테 이미 하나님이 먼저 다 쏟아 부어주시는 거야. 그 런데 받고 나니까 너무 고맙거든. 너무 감사하거든. 받을 자 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굳이 우리한테 주실 이유가 없거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셔야 할 책임이 없어. 그런데 다 주셨단 말야. 아니 하다 못해 옆집 아줌마가 고구 마만 가져다 주셔도 고마운 건데 하나님은 아들까지 주셨단 말야. 이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반응이 나 오냐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주님께 뭘 드릴 수 있을까요? 뭘 할 수 있을까요?"가 되거든. 이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거야. 그게 물질이든 헌신 이든 봉사든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는 거지 이걸 무슨 투자 개념으로 가는 게 아니라니까. 맞아. 십일조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헌금, 봉사, 모든 구제는 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의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겠네. 그렇지. 그런데 한국교회는 교인들한테 은연중에 십일조 하면 복을 받고 안 하면 벌을 받고 이런 생각을 심어줬단 말 야. 이건 기독교가 아니라 사실 샤머니즘에 기초한 기복신 앙이거든. 이게 왜 이러는 걸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나도 거기에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아. 아닌 줄 알면서도 괜히 마음 한 구 석이 불안하거든. 내가 보기엔 교회에서 그런 강박을 심어줘서 그런 것 같아. 예수님이 이미 끝내시고 자유하게 하신 율법을 다시 끌어다 가 우리가 또 하나의 율법을 만들어 버린 거지. 처음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란 게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되거든. 파스칼의 <팡세>를 보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성 이 아니라 습관이다.” 라는 말을 해. 우리는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거야. 나도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자라오면서 십일조를 이렇게 내야 된다고 배웠잖아.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면서 교회에서 배운 개념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았어. 그런데도 마음 저 깊숙 한 곳에서 왠지 찜찜한거야. 몇 십년의 습관이 우리를 불안 하게 하는 거라. 오래된 습관, 이걸 사람들이 못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무서운 습관이지. H S H H S H S S 福 8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1. 자 그렇다면 대안은 뭐냐?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서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되는 거지. 습관은 나 혼자 들일 수 없는 거거든. 그럼 좋은 공동체가 어 디 있냐? 여기서 막히는 거야. 그런데 사실 성경대로 행하 는 공동체는 우리가 함께 만들 수 있어.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느냐는 거야. 그 동안 내가 기존 교회에 다니면서 누리던 모든 편안함을 포기할 수 있느냐는 또 다 른 문제거든. 이거는 다음에 한번 대형교회에 몰림 현상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구. 어쨌거나 한국 교인들한테는 십일조가 푸코가 말한 ‘훈육(- discipline)’일 수 있는 거지. 인간이 학습으로 몸에 익어져 버린 것이 인간을 움직여 가 는 거야. 그래서 훈육, 훈련이 중요하면서도 무서운 거지. 잘못된 훈육을 통해서 습관이 들면 그것을 따르게 되는 거 잖아. 따르게 되지. 그러니까 인간이 공동체 속에서 주위의 영향 을 많이 받는데 대부분 한국교회에 들어가면 주위가 다 그 런 분위기야. 그러면 그 분위기에 흡수될 수 밖에 없거든. 한국교회 십일조의 특수성 그렇지. 게다가 평신도같은 경우에는(평신도라는 용어자체도 문제 가 있지만) 어쨌든 보통 신학이나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 하지 않으면 성경에 대한 지식은 목사한테 밖에 얻을 수 없 잖아. 그러니 목사가 잘못된 정보를 주면 그게 사실인줄 알고 그 공동체는 그걸 다 추종하게 되는거지. 그렇지, 맞아. <설득의 심리학> 같은 설득 관련된 책을 봐도 '권위'는 아주 강력한 설득의 방법 중 하나이거든. 나는 외국 교회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국 교회는 과도한 권위인건지 는 모르겠지만 목사가 얘기한 것은 100% 아니 150% 따라 야 하는 분위기잖아. 그리고 심리학에서도 나오지만 어떤 집단에서 다 공통적으 로 ‘예스(YES)’라고 하는데 누군가가 거기에 대고 ‘노(NO)’ 라고 말하기도 힘들고. 나만 하더라도 의심이 될 것 같기도 한데 다들 그렇게 그냥 가게되면 그런가보다 하게되더라고. 믿음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십일조에 대한 걸 의 심하거나 하면 믿음이 부족한 거라고 몰아가는 분위기가 있잖아. 솔직히 난 그게 십일조의 정신을 어기는 거 같아. 신앙이라 는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사람들을 조작(manipula-tion) 하는 거지. 한국교회가 처음 가르칠 때부터 굉장히 잘 못된 부분이 많은 거야. 처음이라는 게 시대적 처음을 얘기하는 거야? 아니면 신앙 을 갖는 처음 시작을 얘기하는 거야? 둘 다겠지. 일단 역사적으로 볼 때 소위 한국의 교회를 대표 하는 주류 대형교회들의 가르침이 한국의 역사가 흘러오면 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업적을 내고 이런 흐름과 궤를 같이하거든…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야. 정치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것처럼 한국교회 안에도 매우 다양한 입장들이 있거든.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소위 유명한 대형교회들을 말하는 거야. 개신교도 한국 역사의 흐름과 같이 간다는 거지? 그치. 원래는 교회가 세상의 잘못된 부분들에 대해서 비판 하고 견제해줄 수 있는 매우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도 리어 그런 세상의 잘못된 흐름을 환영하고 받아들인 거야. 나는…그러니까 한국의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 의 가르침에서 출발했는데…이게 미국의 개신교와 같이 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물질적인 성장의 흐름이 미국도 그 렇게 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국도 이걸 받아들인 거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 H S H S H S H S H S H S H 황코치는 9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2. 십일조 정신에 맞는 진정한(?) 십일조 사용하기 큰 교회의 틀을 보면.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 진영과 한국 의 주류 기독교와 흐름이 같이 가고… 이거 잘못해서 미국 나쁜 놈하면 종북몰이, 좌파 이렇게 몰리는 거 아냐? ㅋㅋ 하하 어쨌거나 흐름을 같이 가고 있는 건데… 사실 성경의 정신에 충실하면 할수록 보수가 보기에는 너무 진보적으로 보이고, 또 진보가 보기에는 너무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어…. 가령 보수가 보기에는 성경은 지나칠 정도 로 약자 배려나 부의 분배를 강조하거든… 반면 진보가 보기에 성경은 지나치게 생명존중이나 동성애 반대 등의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니까… 그러니까 결국에 성경에 충실한 기독교인은 완전한 보수도 완전한 진보도 될 수가 없어서 어느 쪽에서도 별로 환영을 못받아…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맹목적으로 보수정당이 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거지. 왜 그럴까? 며칠 전에 광화문을 갔는데 한편에서는 기독교 인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피켓시위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 다른 기독교인들이 반대시위를 하는 걸 봤 다. 참 거시기(?)하더군. 글쎄…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워낙 특이하니까… 우리가 지금 십일조 논하는 것 자체도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야. 다른 나라에서는 십일조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되 질 않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에는 십일조를 폐지했다가 중세교회가 되면서 십일조를 다시 도입했단 말이야. 그 다 음에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십일조가 다시 폐지되거든. 우리나라의 상황과 외국의 상황 자체가 달라. 유럽에서는 세금 걷는 것과 십일조와 무슨 관련이 있던 건가? 독일 같은 경우에 독일의 공식 종교가 루터교야. 그래서 루터교 성직자들은 국가에서 월급이 나와. 공무원과 비슷한 개념인 거야. 그래서 교인들이 십일조를 따로 낼 필요가 없 이 국가에 내는 세금에서 목회자들한테 월급을 주는 거야. 월급을 받는 거네. 그치 월급을 받는 거지. 이게 꼭 좋은 거냐는 또 다른 문제인데 어쨌거나 십일조가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심각한 이슈가 되는 것은 이게 돈문제 라 그래. 돈이니까. 우리가 구약에서 십일조 외에도 안식일 지키라는 개념을 가져와서 ‘주일성수’를 강조하는데 사실 주일성수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만큼 심각하진 않거든. 중요 하게 여기긴 해도. 그렇지. 생각해보면 그것도 웃기는 거네. 역시 ‘돈’이 걸려야 이슈가 발생하는 건가? 그렇지. 십일조는 더 민감할 수 밖에 없지. 더욱이 요즘 십일조가 더 문제가 되는 건 교회가 십일조를 제대로 못쓰 니까 그래. 어떤 분들은 기꺼이 십일조 내고 싶어하거든. 주 위에 보면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분들도 많아. 도리어 더 많이 못 드리는 것을 안타까워하기 까지 해.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헌금이 교회에 들어갔는데 교회에서 그 돈을 성경의 정신에 입각해서 이웃과 나누고 정말로 좋게 잘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상한데 건축하고 말 도 안되게 목사들이 자기 배나 부르려고 뒤로 삥땅치고 이런 모습을 보니까 불안해서 못 내겠다는 거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좋지만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못 내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목사는 또 십일조는 자기 교회에 내야 된 다라고 강조하는 거야. 그런데 목사 말이니까 아닌 거 같으 면서도 지켜야 할 것도 같고, 이렇게 성도들이 갈등이 심해 지는 거지. 이거 얘기 잘했는데 내가 소속된 교회에만 내야 돼? 원칙적으로 안 그래도 돼. 자율적으로 내면 돼. H S H S H S S H S H S H S 황코치는 10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3. 원칙적으로 안 그렇다는 건? 아까 말한 것처럼 율법으로서의 십일조 자체가 이미 무효 니까. 그러니까 사실 많은 질문들이 있는데 이런 질문들을 해결하 려면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큰 그림이 있어야 돼. 일단 율법이라는 것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되고 그 다 음에 구약의 십일조의 내용, 십일조 정신이 무엇이고, 그 정 신을 오늘날 계승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계승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들어가야 하는 거지. 현실적인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십일조를 내는 게 레위인들 을 위해서 내는 거잖아. 쉽게 생각해서 목사의 월급을 위한 거잖아. 우리가 십일조를 안 하면 목사를 비롯해 사역자들 이 굶잖아. 그리고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어디 동아리나 커뮤니티에서 회비 내듯이 접근한다면 우리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게 맞는 게 아닌가? 그렇지. 맞아 사실 통계를 보면 한국 교회의 80%이상의 목회자들이 최저생계비 밑으로 살아가거든. 십일조를 내려 고 할 때에 교회 공동체를 일종의 가족개념으로 보면 좋을 것 같아.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있어. 그리고 그 공동체의 영적인 리더인 목회자가 있단말야. 그래서 돈을 버는 공동체의 구 성원들이 그 공동체의 목회자를 책임져 주는 것은 참 아름 다운 모습이란 말야. 신약적으로 봐도 그런 개념이 있는 거구. 이런 상황에서 만약에 내가 헌금을 안 하면 목사가 굶는다 고 생각을 하면 이건 안 할 수가 없는 거잖아. 이건 뭐 헌금하면서 하나님께 복 받는다 이런 개념보다 앞 서서 사랑하는 가족이 굶는거란 말야. 그러니까 일단 가족을 부양하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만약에 좀 더 풍성해 진다면 이제 밖으로 흘려보내야 되는 거지. 교 회에 자꾸 쌓아놓으려고 하지 말구… 그런데 이게 안타까운 게 교회가 대형화가 되면서 익명성이 커지고 내가 교회에 내는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되거든. 그런데 공동체가 작으면 바로 바로 보이거든. 내가 낸 ‘연보’ 로 교회 어떤 물건이 들어오고 힘든 교인들이 밥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다 보이는 거거든. 그런데 이 시 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 가길 싫어해. 귀찮거든. 너무 사생활이 노출되거든. 결국 공동체성이 사 라지고. 그런데 결국 행복은 이런데서 오는 건데. 그렇지 맞아. 뭔가가 조금씩 아귀가 다 안 맞아 들어가는 거야. 정말 사람 들이 원하는 건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행복해지는 건데. 교회는 또 큰 교회를 가기 원해. 왜? 여러 가지 좋잖아. 주차 도 좋구. 애들 교육도 좋구. 편하구. 나도 그래. 그래서 큰 교회 다니잖아..ㅋㅋ 그러니까 이런 모순들. 이런 것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이런 게 계속 고민이 돼. 대형교회의 편안함에 익 숙해진 사람들이 과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성경이 가르치 는 진리를 따라서 살수 있을지… 정리하자면 십일조를 낸다고 할 때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내 가 십일조를 안내면 너무 힘든 공동체야. 그럼 당연히 그 공 동체에 하는 거야. 맞지? 그치. 당연하지. 그래야지. 또 공동체가 커. 그런데 내가 드리는 십일조가 아주 투명하 게 잘 사용하고 있어. 구약에서 말하는 의미에 충실하게. 그럼 그 교회에 내면 되 는 거고. 이것도 맞지? 그치. 충실하게 십일조의 의미를 살려서 헌금을 사용한다면 그 교회에 내야지. 왜냐면 내가 원하는데 십일조를 하다 보 면 내가 또 직접 그 물질로 누군가를 컨트롤 하려고 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교회가 잘하고 있으면 내가 다니는 교회 에 내면 좋아. 그런데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교회가 잘 못하는 것 같아서 십일조 내기 싫거든. 그럼 교회의 재정사용이 너무 성경적이지 못해서 양심이 너무 괴로운 사람들은 어떻게 해?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충분히 부유하고 더욱이 십일조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차라리 십일조가 필요한 곳 H S H S H S H S H S H S H S 황코치는 11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4. 으로 나누어 보내는 것이 더 십일조 정신에 맞는 것일 수도 있어. 그렇지. 십일조가 ‘십일조 정신’에 맞게 쓰여야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런 고민은 사실 대형교회 교인들이 하는 고민인 거지. 그렇지. 우리가 얘기한 것들은 돈이 많이 걷히고 있는 ‘메가 처치(Mega Church)’를 대상으로 한 거지. 사실 ‘메가처치’ 만도 아니야. 어찌 보면 자립이 가능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교회인데 헌금사용이 불건전해 보이는 교회들...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편한 자리를 포기하고 살아가시는 사 역자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과 물질을 나누는 것은 참 아름 답고 귀한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리고 현실적으로 볼 때, 십일조를 분산해서 내는 것이 된 다면. 비율은 상관없는 거잖아. ㅋㅋ 이제 비율이나 금액 이런 거 신경 안써도 된다니깐. 본 인의 양심에 따라 하면 되는거지. 그럼 매번 바뀔 수 있겠네. 그 선택에 있어서 핵심은 아까 말한 십일조 정신을 고려해 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각자 양심에 따라 정해야 하는 거지. 한국 교회의 특수 상황 정리하면 펀딩 개념으로 십일조를 냈던 사람들은 이제 마음 을 바꿔야 하는 거구. 또 혹시 두려워하는 사람도 마음을 바꾸면 되는 거지. 이제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면 되는 거고. 이게 진정으로 성경에 나온 ‘십일조 정신'이니깐.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해결되었다고 치면, 이제 십일조를 내는 것에 대해서 아까운 마음은 없어. 이미 건전한 습관도 되었고, 구약의 십일조의 정신도 충분히 이해도 하고. 게다 가 성경이 말하는 관계 차원의 ‘복’을 원하는 사람들인데 하 필 교회가 잘 못하는 것 같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번째, 교회를 감시해야 돼. 교회가 헌금을 잘 사용하는지 교인들이 감시하는 것은 교인들의 책임이야. 그런데 귀찮아 하거든. 그런데 서로 책임지는 게 공동체잖아. 대형교회는 공동체성이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거야. 익명성 이 보장되구. 귀찮거든. 그러니까 이거는 결국 신앙인들이 결단할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러네. 진짜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책임질 일은 줄어들 긴 하지. 어찌 보면 나도 그래서 큰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일 지 몰라. 찔리는군. 그러니까 서비스 받는 개념인 거지. 가서 좋은 설교 한편 듣 고 헌금 좀 내주고.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하니까 기분도 좋구.. 그치. 완전히 자본주의식 방법인 거야. 이건 무슨 대형마트에서 상품 소비하는 것과 같은 거지. 그래서 ‘메가처치’로 다 가는 거지. 그치 ‘메가박스’ 이용하듯. ㅎㅎ 중요한 것은 내가 교회에 더 욱 연루되야 한다는 거야. 서로 서로간에 책임을 져주는 게 공동체라는 거지? 교회 공 동체도 그래야 하는거구? 그래. 한국교회 정황이 너무 복잡해. 너무 너무 복잡한 상황 인 거야. 어른들의 경우에는 교회가 잘못하는 걸 알아도 쉽 게 떠날 수가 없어. 당연하지. 일평생 다닌 교회. 아는 사람도 다 거기 있고. H H H H S H S H S H S H H H H S S S S S S ! 12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5. 그간 살아온 내 인생이 다 거기 있으니까. 그러니까 목사가 잘못된 걸 알아도 교회를 떠날 수가 없어. 모든 게 다 거기에 있으니까. 그런 분들 같은 경우에는 목사 가 잘못한 걸 알아도 너무 괴로우니까 그냥 모르고 싶은 거 야. 눈과 귀를 닫아 버리는 거지. S S 이제 이런 어른들은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런 분들을 구태여 우리가 가서 들쑤실 필요는 없어. 젊은이들은 다르지. 목사님이 계속 십일조는 자기 교회에 내야 된다고 그래. 난 솔직히 그런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거 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 악한 방향으로 계속 물질이 쓰일 거 아니야? 오케이. 나도 같은 생각이야. 오히려 그럴 때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어떻게 이것을 사 용해야 할지를 고민해야지. 그런데 계속 말하지만 고민을 안 할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거야. 그리스도인은 고민을 해야 돼 그래 인정. 또 찔린다. 하나님 곁에 갈 때까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야. 고민하길 포기하는 건 타락의 지름길이야… 정말 좋은 목사 만나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런 목사들이 많지 않아…ㅎㅎ 사실 정말 신실하게 사역하면서도 경제적으로 힘든 사역자 들이 주위에 보면 많거든. 이런 분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 는 거야….지속적으로… 선교적 차원에서 지속성(sustainability)이 참 중요하거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 감정적이서 줄 때는 확 줬다가도 식 으면 또 확 빼거든. 이건 문제야. 난 목회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세상 속에 있는 성도니 까. 근데 구약의 의미대로 쓰일 수 있다면 우리가 누굴 도울 지 잘 모르니까…대형교회 목사들이 농어촌의 작은 교회 들을 후원하면 좋잖아. 물론 하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좋지. 근데 안타까운 건 너무 홍보용으로 하는 거야. 교인들 보여주려고 찔끔찔끔… 맞아. 나도 그렇게 느껴지더라구. 모 극단적인 비유지만 큰 교회에서 1,000명한테 10원씩 나눠주면 받는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지. 1,000명한테 줄 거를 차라리 100명한 테 1,000원씩 주면서 실제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실어주는 게 더 의미 있는 거 아닌가? 물론 1,000명한테 주는 게 나쁘 다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해줘야 맞는 거잖아… 나도 이번에 준비하면서 알았는데 어떤 교회는 십일조가 15 만원이 안 되는 교인한테는 교회에서 십일조를 환급해준데… 잉? 무슨 말인지? 정부도 세금을 환급해주는데 하물며 교회에서도 환급을 못 해줄 이유가 없다는 거지. 일단 교인들이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것은 받는데..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리던 분들한테 갑자기 십일조 내지말라고 하면 마음이 불편하니까…그런데 십일조가 15만원이 안 되는 교 인들은 한달 월급이 150만원이 안 되는 거잖아…그러니까 그분들한테는 다시 십일조를 환급해 주는거지. 멋있잖아… 자! 그럼 다시 돌려받았다고 치자. 그럼 그 돈을 또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하게 될거아냐? 헌금 돌려받은 거니까 아무 렇게나 쓰지는 않지 않을까? ㅎㅎ 근데 그 돈으로 가족끼리 외식을 해도 그건 십일조 정신에 맞는 거 아닌가? 그래 맞아. 십일조 정신에 맞는 거지. 돌려받은 돈으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면 난 마음은 불편할 것 같다. 공돈 생겼다 내가 낼게 이러진 않을 것 같아. ㅋㅋ 어떤 분들은 그 돈으로 컴패션이나 그런 단체들을 통 해서 더 가난한 사람들을 후원하는 거지. 그러니까 방법론 에 대해서는…우리가 어떻게 십일조 정신을 이 시대에 적용 할 것인가는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거지. 맞다 틀리다 가 아니고. H H H H H H H H S S S S S S 황코치는 13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6. 사실 교회에 헌금종류가 많은 것도 좋은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온 건데. 처음 생길 때는 나쁜 의도로 생기지는 않았을 거 란 말야…건축 헌금도 처음부터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었기 때문에 악용되는 부분 도 있고.그러니까 이제는 좀 더 창의적으로, 사실은 헌금에 서 십일조란 명목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거든. 그러게 교회 헌금 종류가 왜 그리 많아? 헌금 봉투 인쇄값만 해도 꽤 들겠어 ㅎㅎ 사실 요즘 헌금 종류가 많아진 건, 미안하지만 교인들에게 돈을 뽑아내려는 그런 목적도 많았을 것 같아. 솔직히 그래 보이잖아. 그러니까 교회 헌금은 심플해야 돼. 어떤 교회는 교회에 주보에 다가 십일조 낸 사람 이름을 적어. 어떤 교회는 이름도 불러준다던데. 내가 그런데 까지는 못 봤는데 이름 적는 교회는 좀 봤거든. 어떤 성도는 헌금 냈는데 주보에 안 실리면 교회 사무실에 와서 따진단 말야. 내가 냈는데 왜 주보에 이름이 안 나왔냐? 이러면서. 그런데 주보에 이름을 안 적으면 헌금이 확 준데. 현실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너무 강한 거야. 그런데 원래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헌금은 그냥 교회 공동체를 위한 거야. 그냥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만큼 최선 을 다해서 드리면 되는 거지. 오일조도 좋고, 십일조도 좋구 십이조도 좋구. ㅎㅎ 그러면, 세전 세후냐 이런 것도 의미가 없는 거네. 당연, 당연히~~ 아무 의미 없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 많이 버는 사람은 십 분의 오도 드릴 수 있구…십분의 구를 드릴 수도 있는 거구. 반면에 돈 을 너무 못 벌면 드릴 수 있는 만큼 정성을 다해서 드리면 되 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안 드리는, 아니 못 드릴 수도 있는 거지. 이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거야. 돈이 없는 사람, 도리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머리 속에 십일조를 꼭 내야 된다고 세팅이 된 사람들한테는 아 까 언급했던 교회처럼 십일조를 돌려주는 시스템도 방법인 것 같고. 여하튼 방법은 우리가 창의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에게 주신 상상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지. 오케이 좋아. 그런데 좀 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얘기하자 면 어떤 교회에 들어가서 꾸준히 헌금을 냈어. 결국 내가 교회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져. 이게 성 경적인 건가? 예를 들어서 교회 주차장은 교인들만 사용할 수 있어. 그리 고 외부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어. 이게 성경적인가? 사실,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지. 근데 한국교회가 많이 그래 왔잖아. 한국교회가 성경대로 살아왔다면 개독교네 뭐네 욕 먹을 필요가 없겠지. 우리가 늘 하는 말이지만 내가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지 않 고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국교회의 현상만을 봤다면 나도 극단적인 안티 기독교가 되었을 것 같아. 굉장히 냉소적인 시각을 가진 100% 안티.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말씀으로 들어가 보니까 성경이 가 르치는 기독교는 그게 아니더라구.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보는 거지. 물론 한국 교회에서도 말씀대로 가려고 분투하 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고 믿어. 그런데 그런 분들은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아! 그리고 분당에 사는 류모자매가 질문을 전해달 라는데 ‘온전한 십일조’란 말이 왜 나온거야? 정확하게 10% 따악 내라는 거야? 모야? ‘온전한’ 이라는 말은 구약 말라기 3장 10절에 나오는 표현 인데 원래 히브리어는 ‘모든 십일조’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모든 십일조를 목적에 맞게 사용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사용된 표현이야. 십일조 정신에 맞게 사용하라는 거지. 따라서, ‘온전한’ 십일조는 정확하게 10퍼센트를 내라는 의 미가 아니라 십일조의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라는 거지. 그러면 한 교회에 10프로를 전부 내야 하는 질문도 무의미 한거네. 사실 그렇게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되게 너무 복잡한 일이 되는 거지. 십일조 하나 낼라고 세무사를 따로 둬야할 지경 이 될수도 있어. ㅎㅎ 예를 들면 어떤 집은 아버지가 월급을 받아서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돈에서 엄마한테 생활비를 주 H H H H H H S S S S S S S 황코치는 14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7. 셨어. 그러면 엄마는 생활비에서 또 십일조를 하고, 남은 돈으로 애들 용돈을 줬어. 애들은 또 그 돈으로 십일조를 해. ‘온전한’ 십일조 낼라면 계산기 무지 두들겨야 할걸. 크큭. 그렇네. 우리나라만 이렇게 열심히 내는 것 같아. 아냐. 미국의 보수적인 교회들도 십일조는 열심히 하고 있어. 계속 강조하지만 십일조가 의미 없는 건 아니니깐. 십일조의 폐해 때문에 그런거지. 숭실대의 조성기 교수님이 <십일조는 없다>라는 책을 쓰시기도 했거든. 그런데 그분 이 주장하는 거는 극단적으로 헌금 내지 말라 이런 건 절대 로 아니고 “구약의 십일조라는 형식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의 사역으로 끝났다.” 그러니까 성경 정신에 입각해서 연보 해라 이런 거지. 그런데 이 책을 비판한 분도 있잖아 맞아. 총신대 김인환 교수님 같은 분은 이 책을 비판했어. 그 런데 넓은 의미에서 보면 두 분이 다른 얘기를 하는 거는 아 니야. 두 분 모두 성도가 마땅히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서 하 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맞는데, 한쪽에서는 십일조라는 형식이 아직 유익하다고 보는 거고, 한쪽에서는 십일조라는 형식은 필요 없다라고 보는 거지. 여기에 대해서는 입장차 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예배와 이웃을 돌보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 고 인정하는 정신은 다 좋다는 거야. 그런데 이 정신을 어떤 형식에다 담을 것이냐 십일조라는 형식을 가져다 쓸 거냐 아니면 이 시대에 맞는 다른 형식에 담을 거냐 여기에는 누가 맞다 라고 말하기에 애매한 부분 이 있는 거지. 그래 그건 동감이야. 중요한 건 계속적으로 오늘 반복하면서 강조하는 거지만 ‘ 십일조 정신’이라는 거지.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은 한국교회가 잘못했으 니까 그런 거구. 그러니까 이제 잔 걱정들에서는 자유로워 졌으면 좋겠어. 오케이. 알겠다. 우선 나부터 좀 자유로워졌다. 그러면 NGO 나, 시민단체에 십일조 내도 되는 건가? 교회가 아닌 단체에? 넓은 의미에선 괜찮지. 우선적으로는 예배와 믿음의 공동체 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우린 모두 지 구촌 한 가족이니까. 공동체나 약자보호 차원을 확장하면 NGO나 시민단체를 돕는 것도 해당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크리스챤은 크리스챤한테만 해야한는 거 아냐? 십일조 혜택의 대상인 ‘객과 고아와 과부’라고 할 때 객은 나그네거든. 요즘으로 치면 외국인 노동자쯤 될까? 이 사람 들은 꼭 하나님 백성이 아닐 수 있어. 그러니까 교회의 사명이 뭐냐고 했을 때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비춰주는 건데. 이 빛을 무엇으로 비출 것인가? 할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안하세요, 기도할게요”라고 말 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뭔가 가야 된단 말이지. 이 걸 원래 교회가 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 교회가 지방에 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체육관을 지어주는 건? 그 지역주민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그 체육관을 지방에 있는 복음적인 교회가 운영할 수 있도 록 연결해준다면 더욱 좋겠지. 크리스챤이 아니라도 체육관을 막 써도 된다는 거지? 농구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럼 당연하지. 이제 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어. 가령 요즘에는 교회들이 지역 학교에 강당을 지어주고 그 강당을 주일만 임대해서 쓰기도 하거든. 이게 다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 정신에 입각한 게 아닐까? 예배, 약자 보호, 공동체. H H H H H H H S S S S S S S 다시 한번 핵심은 '십일조 정신'에 따라 행동하기 황코치는 15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 18. 그 범위를 어디까지 적용할까 생각해볼 때 십일조로 아프리 카 사람들 도와주는 것도 참 좋은 거고. 그게 교회답고 기독교다운 거니까. 객이 내 앞에 있는 사람 만 객이 아니니까. 내가 알고 있고, 믿는 기독교는 성경얘기 구태여 안해도 성경이 가르치는 정신대로 살면 사람들에게 충분히 존경 받을 수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원래 초대 교회가 보여준 기독교가 그런 거잖아. 소수에 불과했던 초대 교회가 생존하고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의 삶이 완전히 달랐거든. 사랑을 했거든. 아무 조건 없이 사람들을 섬겼거든.. 한국교회가 그 힘을 많이 잃어 버린 거지. 흠… 다시 그 힘을 찾을 수 있을까? 너무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신실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크리스챤 들이 모인 소수의 공동체, 소수의 교회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면 조금씩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우리부터 잘해야지..ㅋㅋ 흠… 그래, 오늘 나눈 이야기 무지 유익했다. 앞으로 자주 보자구. 신목사. 그래 황코치 다음엔 또 무슨 주제를 해야되나? 하도 떠들었 더니 이제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목사가 쏠게. ㅎㅎ H S H S 황코치는 16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FIN Special thanks to BLiss & Ryu 내용 문의나 신앙상담은 언제든지 아래 이메일 주소로 남겨주세요. word1st@naver.com
  • 19. 황코치는 말씀으로 신목사는 세상으로 십일조 편 아둘람공동체교회 Adullam Community Church Copyright 2014 A dullam Communit y Church